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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왜냐면] 에너지저장장치 사고, 반쪽짜리 대응으로 끝낼건가 / 석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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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석광훈
녹색연합 전문위원


리튬이온 에너지저장장치(ESS)가 공장, 변전소, 태양광발전소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화재사고를 일으키는 가운데,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1일 이에스에스 화재 원인 조사 결과와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대로 정부 발표는 반쪽짜리였고, 배터리 업체에 면죄부를 주는 데 급급했다.

그동안 이에스에스 화재사고는 가동한 지 1년을 전후로 집중적으로 발생해왔는데도 이번 발표는 불과 반년만 가동했을 때를 전제로 한 것이다. 사실 이에스에스는 매일 산업용 심야전기 또는 태양광발전으로 충전한 후 각각 낮과 밤에 방전하기 때문에 연중 365회 충·방전을 반복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충·방전을 180회만 반복 시험한 결과 화재가 없었다는 식이다. 즉 이에스에스가 사고를 일으키는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시험을 중단하고 결과를 발표한 셈이다.

또한 정부의 부실한 안전인증제도와 안전성 검증 역량도 문제다. 지난 5월까지 총 23건의 화재사고를 낸 이에스에스는 모두 정부의 인증을 받았고, 화재를 일으킨 배터리의 제조사들에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산업부는 향후 인증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하지만 명확한 사고 원인 규명도 못 하는 부실한 검증 역량이 갑자기 개선될 수 있을까? 한달에 두번꼴로 화재가 발생하는 이에스에스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고, 정부의 대책은 뇌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시한폭탄을 재가동시켜준 꼴이다.

특히 이미 500여곳에 설치된 옥내형 이에스에스는 화재가 발생할 경우 인명 피해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산업부는 지난 정부에서 고시를 통해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기관 건물에 이에스에스 설치를 의무화하기도 했다. 이들 옥내형에서 화재가 없었던 이유는 더 안전해서가 아니라 최근에 설치됐기 때문이다. 이들 옥내형 이에스에스는 지방자치단체 청사와 대학병원, 지하철역사, 공항, 정부출연연구소, 백화점 등에 광범위하게 설치됐다. 물론 산업부는 대형 옥내 이에스에스에 대해 옥외로 이설하고 그 이하 규모는 방화벽을 설치하고 이격거리를 확보한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그러나 규모가 작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며 대부분 건물 지하 변전시설의 좁은 방에 이에스에스를 다닥다닥 붙여놓은 터라 이격거리는 커녕 방화벽을 세울 공간조차 부족하다.

현재의 이에스에스 사태는 과거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신산업정책’의 일환으로 산업부가 부실한 안전성 검토에다 무리한 보조금 정책을 추진해 우후죽순처럼 보급된 결과다. 애초 원가보다 싼 산업용 심야전기요금을 그 절반 가격(㎾h당 최저 27원)에 충전하도록 지원하니 산업체들이 앞다퉈 이에스에스를 설치한 것이다. 보수 언론과 야당이 공격하는 ‘태양광 연계형’ 이에스에스의 보조금 역시 박근혜 정부 말기에 추가됐다.

문재인 정부 역시 이에스에스 사업을 ‘창조경제’에서 ‘4차 산업’으로 꼬리표만 바꿔 개선 조처 없이 방치해왔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산업부 공무원들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외려 청와대 파견, 공기업 사장 후보 지명 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관련 정책이 안고 있는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음에도, 제3의 기관 검증 등도 없이 산업부의 ‘셀프 검증’에만 맡기는 태만함은 문제의 원흉인 이전 정부만큼이나 해악적이다. 최근에는 한술 더 떠 안전성 검증 없이 ‘수소혁명’을 들고 나선 상황이다. 정부는 4차 산업혁명, 수소혁명을 남발하기 전에 인사혁명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시한폭탄이 된 이에스에스 사업에 대해 철저한 책임규명과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하고, 옥내형 이에스에스는 규모를 떠나 모두 철거해야 한다. 배터리 제조업체 역시 산업부 뒤에 숨어 잘못을 은폐하려 하지 말고, 옥내형 이에스에스라도 자발적 리콜을 통해 책임을 져야 한다. 휴대폰 리콜 사례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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