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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정의길 칼럼] 서희 외교의 허실, 미-중에 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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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외교는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고, 고려가 실효 지배하던 강동6주를 공인받은 것뿐이다.

하지만 승산 없는 전쟁을 피했고, 고려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에서 중요 위상을 얻어내는 계기가 됐다. 국제관계를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의 포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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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외교로 평가되는 서희의 강동6주 획득은 세 치 혀로 침공한 거란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했다는 신화로만 채색된다. 당시 고려가 처한 상황과 지불한 대가는 간과된다.

첫째,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떠오르는 거란에 적대관계로 일관하다가 침공당했다. 고려는 초전에서 패배하고, 적장 소손녕의 80만 대군 진격 위협에 시달렸다. 서경(평양) 이북을 할양해주자는 할지론을 국왕 성종이 천명할 정도로 위기 상황이었다.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선제적으로 외교협상에 나선 것이 아니다.

둘째, 서경 이북 할지론에서 보듯, 서희가 획득한 강동6주(현 평안북도 서쪽)는 거란의 영역이 아니었다. 오히려 태조 이래 북진정책에 따라 성종 때에는 강동6주를 포함한 압록강 이남은 고려가 실효적으로 지배해가던 영역이었다. 거란은 고려에 그 실효적 지배를 인정해준 것뿐이다. 거란 입장에서는 강동6주 안팎의 여진족 통제를 고려에 맡기는 동시에 고려와의 국경을 압록강으로 설정해 그 이북으로 진출을 막는 공식적인 조약이었다.

셋째, 고려는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었다. 거란의 신하가 되는 공식적인 신속 관계가 됐다. 기존의 사대관계였던 송나라와는 단교했다.

서희 외교를 냉정하게 평가하면, 거란의 압도적인 군사 위협 앞에서 고려는 거란이 요구하던 사대관계를 수락하는 대가로 강동6주의 실효 지배를 인정받는 거래를 한 것이다. 서희 외교에 대한 폄하가 아니다. 서희는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거란이 후방인 고려와의 관계를 안정화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는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협상을 했다. 서희는 압록강 이북 영역도 협상의 대상으로 삼자고 주장했으나, 강화를 서두르라는 조정의 채근에 밀렸다.

고려로서는 사대관계의 대상을 송에서 거란으로 바꾸며 승산 없는 전쟁을 피했고 시간을 벌었다. 고려는 그 후 송과 외교를 단속적으로 유지하는 한편, 군비를 확충해 거란과는 두차례 더 전쟁을 벌인 끝에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거란과의 분쟁을 종료했다. 거란과의 사대관계는 유지됐으나 고려는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서 중요한 국가가 됐다.

이정신 한남대 교수의 ‘거란과의 외교’ 등이 실린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동북아역사재단)는 고대 이후 한반도 국가들이 중원의 기존 패권국가와 이에 도전하는 신흥세력 사이에서 몸부림친 우리 대외정책의 영욕을 다뤘다. 그 핵심은 두 세력 사이에서 동아시아의 공인된 국제질서였던 사대책봉 관계를 얼마나 유연하게 설정하냐였다. 사대책봉 관계는 상하 관계나 불평등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원의 패권국과 주변국은 조공과 책봉을 통해 서로의 위상을 인정하는 국제질서를 형성했다. 특히 패권국은 주변국의 조공에 대한 답례인 회사를 통해 그 이상의 혜택을 부여하곤 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이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실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 중원의 패권국은 고정불변이 아니고, 이에 따라 사대관계 역시 대상이 바뀌는 것이 고려 때까지 한반도 역대 국가들의 대외정책이었다. 고구려는 사대관계의 국가들인 전연 등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통한 전쟁도 불사했다. 우리 대외정책 역사에서 비극은 조선에 들어서 사대관계가 ‘이소사대’의 경직된 모화 이데올로기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명·청 교체기에 병자호란이라는 참화로 이어졌다.

서희와 그 전후의 대외정책은 최근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나?

첫째, 사대관계는 지금으로 치면 패권국과의 동맹관계이다. 사대관계가 고정불변이 아니듯, 역사의 모든 패권국과의 동맹, 현재의 한-미 동맹 역시 마찬가지이다. 올해 초 한 민간 연구원의 새해 국제정세 전망에서 “한국의 선택은 자명하다. … 자유주의 국제질서다”라고 단언했다. 기존의 미국 패권질서를 옹호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혀서 주전을 부르짖는 목소리로 들린다.

둘째, 패권국가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 한 국가의 ‘자주성’이란 상대적인 문제일 뿐이다. 과거의 사대관계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여된 국제질서였듯이, 현재 패권국과의 동맹인 한-미 동맹 역시 마찬가지다. 사대관계 속의 한반도 국가들은 중원 패권국가의 예속적 번국이 아니었고, 패권국을 상대로 실리를 취하려 했다. 진보진영 내의 적지 않은 이들이 한-미 동맹을 우리의 자주성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또다른 도그마이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격화되고, 한국은 그 중간에 끼이고 있다. 서희 외교에서 보듯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외교는 없다. 무엇보다도 국제관계를 고정된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의 포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겨레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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