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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붉은 수돗물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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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린 기자]

붉은 수돗물이 옆 아파트에서 나왔다. 다행히 우리 집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맑아 보였다. 엘리베이터엔 '수질 검사 결과 적합'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보름 동안 안심하고 썼다. 그런데 이게 웬걸. 5만원짜리 필터를 껴보니 금세 붉게 변했다. 우리 집 수돗물의 정체도 붉은 수돗물(赤水ㆍ적수)였다. 민원을 넣었더니 인천시 관계자는 "수질 검사는 괜찮다고 하는데, 찝찝하면 먹지 말라"는 엉뚱한 소리만 늘어놨다. 정부와 지자체가 고개를 숙였지만 달라진 게 없다. 그래, 우리 집엔 지금도 붉은 물이 흐르고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인천 적수 사태를 취재했다. 김다린 기자의 실제 경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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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수 사태가 계속되는 데도 정부와 지자체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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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일대 학교와 아파트에 30시간 넘게 수돗물 대신 적수赤水(붉은 물)가 공급돼 인근 학교 학생과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습니다…" 5월 31일 금요일 저녁, 아내가 마감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불렀다. 붉은 빛이 역력한 물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광경이 TV에서 나오고 있었다. "지역 카페에서 보니까 뉴스 나온 데가 길 건너 저 아파트라던데…."

섬뜩했다. 혹시 우리 집은? 즉각 주방 싱크대 레버를 돌렸다. 다행이었다. 눈으로 보기엔 충분히 맑은 물이 흘렀다. 난 인천시 서구 마전동 아파트에 산다. 입주한 지 1년, 그래도 새 아파트니까 괜찮겠지. 난 찜찜해 하는 아내를 애써 안심시켰다.

흉흉한 분위기는 꽤나 오래갔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인천시 상수도사업본부 수질연구소에서 보낸 문서가 아파트 입구에 '떡'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지하저수조 샘플 채취해 조사한 결과, 먹는 물 수질 기준 적합." 이를 본 아내가 말했다. "정말이네, 우리 아파트는 괜찮은가 보다."

실제로 사태는 마무리 국면에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7일엔 정부와 지자체로 구성된 민관합동조사단이 "적수가 계속 발생할 경우, 수질이 안정화될 때까지 수돗물을 방류하면 괜찮아진다"고 설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녁 내내 수도꼭지를 열어뒀다. 여전히 맑은 물이었다. 끓여 마시고, 밥을 짓고, 세탁을 하고, 몸을 씻기에 충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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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일 후인 11일엔 '적수 사태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7일 2940건이 접수된 적수 발생 신고 민원이 8일 388건, 9일 89건으로 크게 줄었다는 내용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돗물은 도시의 핵심 인프라 아닌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정부와 지자체가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그렇게 2주가 흐른 14일 저녁. 오랜만에 살펴본 아파트 커뮤니티에선 심상치 않은 제목의 글이 게시돼 있었다. "물 사용하고 계신가요? 필터를 쓰면 몇분 만에 하얗던 필터가 붉게 변해요." "월요일부터 아토피가 올라오고 피부가 오돌토돌해지고 있어요." "시간이 갈수록 물이 더 심각해지는 거 같아요." "세탁기 정수 필터도 파나요?" "불안해서 아기는 친정집에 맡겨뒀어요…. 설거지도 일단 필터된 물로 일단 씻고 생수로 한번 더 헹구고 있어요."

육안으론 맑은 물이었지만…

다급한 마음에 회사 근처(서울 문래동) 마트에서 세면대 정수 필터를 샀다. 아내가 지역 마트에 있는 필터를 구하려다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필터를 설치하고 10분,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하얗던 필터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쇳가루처럼 보이는 알갱이 수십개가 보였다. 1시간이 지나자 필터는 붉다 못해 검게 변했다. "2~3개월 뒤 필터가 다음과 같이 변하면 교체하세요"라고 안내가 된 사용설명서에 그려진 샘플보다 진한 흙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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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론 맑아 보였던 수돗물이 필터를 거치자 1시간 만에 검붉게 변했다.[사진=김다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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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간 이런 물로 씻고 밥을 해먹었던 거야?" 아내의 짜증 섞인 물음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저녁마다 몸이 간지럽던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걸 후회했다. 사춘기 때나 있던 여드름이 생겼을 때도 괜찮을 거라고만 여겼다. 다시 관련 뉴스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태 해결은커녕 영종ㆍ강화로 적수 발생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가장 답답했던 건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무리한 수계전환(정수장간 급수구역 변경)이 원인으로 보인다"는 합동조사단의 발표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기자회견 전문을 훑어봐도 필터가 무엇 때문에 순식간에 붉게 변하는 건지, 이 쇳가루 같은 알갱이의 성분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활자는 없었다.

그렇다고 일개 시민이 상하수도 인프라 노후를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집에서도 붉은 물이 나온다는 걸 인지해서인지, 동네 분위기는 더 험악했다. 15일 밤에 찾은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검단사거리의 풍경은 정말 삭막했다.

서구 맛집이 한데 모여있어 주말마다 사람이 붐비는 곳인 데도 한산했다. 가격이 저렴해 회식장소로 인기만점이라는 한 돼지고깃집 안에는 인근 공단의 외국인 직원 10여명이 두 테이블을 차지한 채 회식을 하고 있었다.

가게 사장은 "손님이 들어설 때마다 생수를 쓰고 있으니 안심하고 드시라고 얘기하긴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몇몇 식당은 "생수로 조리합니다. 걱정 말고 들어오세요."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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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식당 곳곳에선 ‘생수를 사용합니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사진=김다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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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40대 동네주민은 아내, 딸과 외출하고 있었다. "김포에 있는 형님집에 가려고 한다. 물도 물이지만 이 사태가 6월 내내 이어질 수 있다는 불길한 소문도 마음에 걸린다. 어린이집에선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는데, 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나 역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필터로 걸러낸 물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개당 4만~5만원 하는 전용헤드와 필터도 재정적으론 부담이었다. 일단 아내를 친정으로 대피시켰다. 17일 월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적수 발생 민원신고를 했다. 신고 과정에서 참 가치 없는 답변만 들려왔다. 다음은 인천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 직원과의 대화다.

기자 : "육안으론 맑은 물 같아서 2주간 썼는데, 필터로 보니 적수였습니다. 이 물로 밥 먹고 씻었는데 괜찮은 건가요?"

상수도사업본부 직원 : "수질검사에선 음용하기에 적합하다고 나오긴 했거든요."

기자 : "괜찮다는 말인가요?"

상수도사업본부 직원 : "너무 빨갛다면 기분이 찝찝하실 테니 생수를 드세요."

기자 : "전에 마셨던 것도 괜찮다는 얘기입니까."

상수도사업본부 직원 : "그건 제가 확실히 답변할 수는 없구요. 불안하시면 가급적 안 드시는 게 좋다고 안내는 하고 있어요."

기자 : "언제쯤 해결이 된다고 합니까."

상수도사업본부 직원 : "오늘 시장님(박남춘)께서 원인도 발표하고 대책도 발표할 거라던데, 기다려 주시겠어요?"

세달에 교체할 필터를 하루 만에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낸 박남춘 인천시장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언제 수질 회복이 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튿날 정부의 발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동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해 피해를 키웠다"면서 인천시를 비판할 뿐,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는 내놓지 못했다. "직접 마시지는 말라"는 정부의 권고엔 허망한 기분만 들었다. 이미 2주간 식수로 썼던 우리 가족에겐 소용없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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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붙어있던 "수질검사 결과 문제가 없다"는 문서는 "6월 하순에는 기존의 수질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는 박남춘 시장의 사과문으로 교체됐다. 이 기대가 들어맞는다 한들 우리 가족은 열흘을 붉은 물과 더 살아야 한다.

여전히 우리 집에선 정말 더럽기 짝이 없는 붉은 물이 나온다. 샤워기 필터가 붉게 변하는 걸 보면서 씻었는데, 또 몸이 간지럽다. 무능력한 행정 탓에 화가 난다. 철밥통 공무원들이 빚어낸 촌극 탓에 성이 난다. 붉은 물, 언제쯤 우리 집에서 사라질까. 기약 없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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