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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011, 017…헤어지지 못하는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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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저녁 한산한 시간. SBS 로비가 북적였습니다. 네이버 카페 '010통합반대운동본부' 소속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성별도, 세대도, 직업도 모두 다르지만 '정모 공지'에 급하게 시간을 맞춰 만난 이들은 11명.

십수 년 전부터 정부가 추진하는 010 번호 통합에 따르지 않고 원래 쓰던 다른 번호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01X', 즉 011, 017, 018, 019, 016을 휴대전화 식별번호로 쓰는 이들입니다.

▶ [8뉴스 리포트] "011, 017 등 쓰게 해 달라" 번호 소멸에 저항하는 이유 (2019.06.23)

● '번호 사수' 위해 소송도 불사…불 댕긴 '연내 종료' 발표

2007년 네이버 카페에 개설된 '010통합반대운동본부' 소속 회원은 모두 3만 5천8백여 명. 지난 2월, SK텔레콤이 연내 2G 서비스를 종료한다고 발표하면서 카페가 크게 술렁였습니다. SK텔레콤의 발표를 접하고 제휴 알뜰폰 사업자들이 연이어 2G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공지사항을 띄우면서, 남은 2G 가입자들의 불안이 커진 겁니다.

통신사는 서비스 종료 전 관할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정부가 통신사에 할당한 2G 주파수 반납 기한은 내후년인 2021년 6월. SK텔레콤이 연내 종료 계획을 밝히긴 했어도, 정부의 승인 없인 서비스 종료가 어렵습니다.

질의가 빗발치자 SK텔레콤은 최소 6개월 전에 제휴 사업자들에게 서비스 종료 추진 계획을 알려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추진 계획을 발표한 것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카페 회원들에겐 일종의 '각성' 기회였습니다. 카페 회원들은 당장 내 번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달 초 630여 명이 모여 SK텔레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걸었습니다. 소송의 이름은 "이동전화 번호의 번호이동 청구 소송." 지금 쓰고 있는 번호를 유지하면서도 3G, 4G, 5G를 쓰게 해 달라는 겁니다.

● "정모는 처음이라"…'01X'를 지키려는 사람들

정부의 010 통합 정책이 확정된 건 17년 전인 2002년. 본격 시행된 2004년부터는 어느덧 15년이 흘렀습니다. 15년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완고하게 이 번호를 쓰려고 하는 이들이 과연 어떤 이들인지 궁금했습니다.

SBS 사옥에서 진행된 좌담회에 남성 회원 8명, 여성 회원 3명이 참석했습니다. 연령은 62년생 쉰일곱부터 89년생 서른하나까지. 전기·전자 엔지니어, 애니메이터, 마케팅, 컨설팅, 영어 강사 등 각자 분야에서 생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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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정모는 처음이에요." 회의실에 자리를 잡자, 머쓱했던 로비에서의 분위기는 곧 달라졌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공통적으로 자기 번호를 몇 년이나 고수하고 있는지를 포함해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모인 이들 전부 다 01X와 함께 한 시간은 10년이 훌쩍 넘습니다. 좌담회에 참여한 구성원 가운데 가장 연령이 낮은 31살 A 씨도 중학생이던 17년 전부터 써온 번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번호에 얽힌 사연들이 쏟아졌습니다. 17년째 011 번호를 쓰고 있는 개인 사업가 나유창(40) 씨는 이렇듯 굳이 '소수자'를 자처하는 이유로 '차별성'을 꼽았습니다. "사실 특이하잖아요. 번호가 011이다 보니까. 경쟁자들 사이에서 차별화할 수 있다는 느낌도 있고요. 저만 011 쓰는 게 어떻게 보면 소외됐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아 그 011 쓰는 분이요?'라면서 기억해주시더라고요."

20년째 줄곧 018을 쓰고 있는 구본찬(45) 씨도 사업을 하면서 수년간 축적한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번호를 꼭 지키고 싶다고 말합니다. "번호 이동 사실을 알려주는 서비스가 있다고 해도 솔직히 휴대전화에 저장된 1400명에게 일일이 직접 연락해야 인지상정 아니겠나. 1~2년에 한 번 이렇게 연락 오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고 하면 적은 가능성이라도 저에겐 굉장한 손해입니다."

011을 21년째 사용하고 있는 41세 애니메이터 B 씨는 원래 뭔가를 잘 버리는 성격이 아닙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폰도 대학생이 되고 나서 부모님이 처음으로 만들어 준 휴대전화라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2년 전엔 먼저 연락을 할 수 없는 이로부터 10년 만의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말 소중한 사람한테 한 2년 전쯤 10년 만에 연락이 왔어요. 제가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저로선 이 번호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요."

● "퇴근 후 카톡 안 봐도 되고 좋죠"…"중고거래도 01X면 더 믿음 가지 않나요?"

이름이나 주민번호처럼, 식별번호를 분신이라 부르는 이들도 물론 불편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01X 번호를 사용하는 이들은 전체 가입자의 1% 수준인 48만 명 정도(2019년 6월 기준). 여러 세대 통신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통신사 입장에선 '부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전보다 통화음질도 상당히 많이 떨어졌다는 게 사용자들의 불만입니다. 정부에서 일괄 발송하는 재난 문자도 들쑥날쑥입니다. 상당수 업무를 메신저로 처리하는 통에 01X 이용자 대부분 데이터만 쓸 수 있는 태블릿 PC나 010으로 개통한 스마트폰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A 씨(31)는 회사에서 복지혜택 애플리케이션을 구축할 때 담당자에게 불려 갔습니다. 전체 직원 중 유일하게 혼자만 01X 번호를 쓰다 보니 어떻게 할 건지 상의가 필요했던 겁니다. 태블릿도 함께 쓰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답했지만 '유난'이라는 시선은 여전합니다.

"그렇다고 나쁜 점만 있진 않아요." 016을 20년째 쓰고 있는 48세 C 씨는 좋은 점도 많다고 항변(?) 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2G 휴대전화를 쓴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에 퇴근 후 업무 카톡 지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단 겁니다. "없는데 어떡하겠습니까. 내 핸드폰은 016이니까 안 된다고 그러면 다들 아 그렇지 그렇게 넘어가요."

희귀 번호(?) 사용자에 대한 특별한 신뢰도 있다고 합니다. 010통합반대본부를 이끌고 있는 박상보 매니저는 "하다못해 중고거래를 할 때도 01X 번호를 쓰고 있는 걸 보면 그 수가 워낙 적다 보니 '설마 바가지를 씌우거나 등쳐먹진 않겠지'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스팸 문자도 적게 온다고 합니다.

●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과당경쟁 막으려 '통합'

그러나 갖가지 사연들이 있는 이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건 이 반문으로 귀결됩니다. 바로 '왜 정부가 내 개인정보를 함부로 규정하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선 2004년 본격적으로 시행된 정부의 '010통합정책'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사실 01X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통신업계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 이동전화 서비스는 1984년 당시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의 전신)의 '아날로그' 방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로지 음성 통화만 가능한 1세대(1G) 세대입니다. 이후 음성, 문자 서비스가 가능한 2G가 통용됐고, '아이엠티'라 불리는 기술방식이 도입되면서 여기에 데이터 송수신 서비스까지 더해졌습니다.(현재 3G, 4G, 5G 모두 '아이엠티'에 해당됩니다.)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 속에 자리한 통신사 광고들이 있습니다.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자장면 시키신 분', '나도 잘 몰러'. 통신사별로 식별 번호가 정해져 있던 시절엔 통신사를 바꾸는 건 곧 번호를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당수 이용자들은 그럴 유인이 없었고, 결과적으론 통신사들이 통화 품질이나 소비자 후생에 투자하는 것이 아닌 소위 집토끼를 붙잡아두려는 '번호의 브랜드화'에만 골몰하던 시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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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시정하기 위해 정부가 고안한 것이 바로 '010번호통합정책'입니다. 번호이동제도를 도입한 당시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는 "통신사업의 경쟁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번호를 010으로 통합하면서 이젠 식별번호의 차이에 따른 경쟁을 해소하겠다는 겁니다.

2004년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실제로 많은 이용자들이 '010'으로 번호를 바꿨습니다. 특히 3세대 이동통신 스마트폰이 본격 확산된 시기와 맞물리면서 010으로의 번호 이동도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 이동전화번호는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01X 사용자들은 이 정책의 발상에 반발합니다. 성 씨나 주민번호처럼 어느덧 사회적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 식별번호를 국가가 자의적으로 바꿔선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창씨개명이랑 다를 바가 뭐예요?" 좌담회 한 참석자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기술적 진보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내놓는 대안은 이렇습니다. 현재 01X 번호를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명의이전, 이동통신 해지, 사망했을 때는 주저 없이 번호를 반납하도록 하고, 대신 번호를 유지하면서 타 세대 이동통신인 3G, 4G, 5G를 이용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 '한시적 번호이동'의 시한은 현재 사용자들이 사망할 것으로 보이는 시점인 '99년'으로 해달라는 요구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 요구엔 정부는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과기정통부가 통합정책의 필요성에 대해 가장 첫 번째로 언급하는 건 정책 일관성입니다. 2001년 법안이 발의된 뒤 꾸준히 추진하고 있는 정책을 이제 와 되돌릴 순 없단 겁니다. 이미 이전에 통합 정책을 따라 010으로 번호를 이동한 다른 고객들에 대한 형평성도 문제 삼았습니다.

또 IoT 기술 발전에 따라 여러 기기에 부여할 통신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010으로 이동전화 식별번호가 통합될 때 뒤에 따르는 번호 8자리로도 통화 송수신이 가능하다는 점도 언급했습니다.

결정적으론, 현재는 01X 가입자가 0명인 KT가 2012년 서비스를 종료할 당시 이용자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이 기각됐습니다. 당시 이용자들은 번호통합 정책에 대한 위헌 심판을 청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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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청구인들이 오랜 기간 같은 이동 전화번호를 사용해 왔지만 국가의 정책 및 사업자와의 서비스 이용계약 관계에 의한 것일 뿐", "재산가치가 있는 구체적 권리인 재산권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며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

● 밤새 고치고, 코딩하고…"우리는 방법을 찾을 겁니다"

통화 품질 불량, 고장이 잦은 단말기, 서비스 편의 시정 요구의 어려움. 이 여러 가지 난관에도 01X를 사수하려는 이들의 의지는 강력합니다. 네이버 카페에서 이젠 국내에 유통되지 않는 2G 단말기에 대한 해외 직구 정보를 공유하고 고장 시 대처 방법에 대한 집단 지성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박상보 카페 매니저는 직접 프로그래밍도 합니다. 해외에서 수소문 해 구입한 특정 단말을 통해 2G와 3G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듀얼심'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박 매니저뿐 아닌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절 사용하던 번호를 유지하기 위해 최첨단 기술까지 동원하는, 그야말로 '전력 투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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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송은 현재 가장 많은 01X 가입자를 보유한 SK텔레콤을 상대로 한 청구 소송입니다. 당시 헌법소원을 대리했던 최수진 변호사가 이번 집단소송을 또 도맡게 됐습니다. 현실적 승소 가능성은 사실 크게 높지 않지만 기대는 높습니다. 소송인단을 모집한 지 보름 만에 630여 명의 원고가 모였습니다.

사람들의 괄시, 불편함, 심지어 높은 비용, 보조금 제의 등 각종 회유(?)와 여러 차례에 걸친 묵살에도 굴하지 않고 번호를 사수하려는 이들은 전국에 48만 명. 가입자 수가 전체 비중의 1% 미만대로 떨어져, 정부 허가를 거쳐 2G 서비스를 본격 종료한 KT의 선례를 떠올리면 그마저도 아슬아슬한 수준입니다.

퇴근하자마자 수도권 각지에서 목동으로 모인 이들은 3시간에 가까운 좌담회가 끝나고 '치맥'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어떤 추억, 애틋함 그리고 또 어떤 희망을 두루 나누었을지 굳이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다만 좌담회 막바지, 추가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분이 있냐는 질문에 한 참석자가 여운이 가득한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어요. 영화 대사처럼, 우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

10년 넘게 소멸에 저항하는 이들, 이들의 소멸되지 않을 권리는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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