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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취재파일] "여름 전기료 1만 원 깎아드립니다"…그런데 누구 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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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진 구조 그대로인 누진제 개편안…뭐가 바뀔까?

현행 누진제에서 요금은 3단계입니다. 사용량이 적을 땐 kWh당 93원입니다. 일정량을 넘어가면 요금이 두 배로 오르고, 한 번 더 경계를 넘어서면 3배인 280원으로 오릅니다. 똑같이 TV를 한 시간 보더라도 전기를 많이 쓴 상태라면 아닌 경우보다 3배 더 비싼 요금을 뭅니다.

정부의 누진제 개편 후보안은 3개였습니다. 하나는 복잡한 누진 구조를 다 없애고 요금을 125원으로 통일하는 안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 없애지는 말고, 가장 요금이 비싼 '3배 구간'만 없애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3단계 요금 구조를 그대로 두고, 가장 싼 구간과 중간인 '2배 구간'을 조금씩 넓히는 안이었습니다.

최종 선택된 건 마지막 안이었습니다. 결국 누진 구조는 그대로인 셈입니다. 민관합동 누진제 TF가 선택한 안은 그래서 '누진제 개편'보다는 '여름철 전기료 할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누진제 개편안임에도 누진 구조가 그대로라는 것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애초에 누진 구조를 뜯어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요. 원래 민관합동 누진제 TF는 여름철 전기 요금을 줄이기 위해 꾸려졌습니다.

● 깎아주는 전기료 2천800억 원…누가 대신 낼까?

앞으로 3가구 중 2가구는 지난해와 똑같이 전기를 써도 7월과 8월 전기 요금이 1만 원 정도씩 줄어들게 됩니다. 쓴 만큼 돈을 내는 것은 시장의 규칙입니다. 지난해와 똑같이 썼는데 전기 요금을 덜 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 대신 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줄어든 전기 요금은 누가 부담하는 걸까요?

먼저 한국전력입니다. 한전은 요새 고민이 깊습니다. 여름철 요금 할인이 확정되면 산업부 추산 매년 2천800억 원 규모의 추가 손실을 떠안게 됩니다. 지난 해 2천80억 원 적자에 이어 올해 1분기 적자만 6천300억 원에 달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한두 푼도 아닌 손실을 더 얹겠다니 난감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전 주주들은 곧장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공기업 한전은 주식회사이기도 합니다. 기업 가치를 보고 투자했는데, 정부가 팔 비틀어 기업에 손실을 강요한다는 게 소액주주들 주장입니다. 한전이 여름철 요금 할인을 받아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합니다. "회사에 손실을 끼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며 이사회에서 안건을 통과시키면 이사들을 배임 혐의로 고발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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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결정권을 가진 한전 이사회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공은 넘어왔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사회 내부에서도 이번 요금 할인안대로라면 경영 악화가 심각해져 그대로 받을 수는 없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습니다. 주식회사이니 경영 악화를 초래하게 되면 배임 문제도 따라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이사회에서 8명의 비상임이사 모두는 여름철 전기 요금 할인안을 넘겨받은 그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합니다. 비상임이사는 민간 기업의 사외이사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부결되지 않은 것은 7명의 상임이사들이 공개적으로 TF 권고안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민관합동 누진제 TF가 결정한 안이라며 정부가 지그시 어깨를 누르는데, 공기업이 따르지 않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지난 21일 한전 이사회에서 '보류' 결론이 나온 이유입니다.

다음은 정부입니다. 정부는 한전 손실을 메울 방안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먼저 5조 원에 육박하는 에너지 특별회계에서 돈을 끌어다 쓸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철 전기 요금 일시 할인 때에도 이 회계에서 350억 원을 꺼내 한전을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면 요금 할인 부담 일부를 정부가 대신 지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에너지 바우처'라는 일종의 전기 교환권을 저소득층에 지급해 한전의 재정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세금 내는 국민 몫으로 돌아옵니다. 정부는 아직 구체적인 지원 규모와 방법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름철 전기 요금 할인이 국민 복지를 위한 정책인 만큼 결과적으로 한전 손실의 상당 부분을 정부가 보전해 줄 것이라는 관측이 많습니다. 정부가 펴려는 재정 지원은, 방법이 어찌 됐든 근본적으로는 세금을 걷어 충당하게 됩니다. 1년에 두 달, 전기 요금을 1만 원씩 깎아준다는 이야기가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할인 금액의 일부는 한전, 대부분은 세금 내는 우리가 도로 부담하는 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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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년 묵은 누진제는 손보지 않아도 되는 걸까?

쓴 만큼 돈을 내는 것은 시장의 규칙입니다. 그런데 전기 요금은 예외입니다. 똑같은 1kWh도 많이 쓸수록 더 비싸집니다. 요금 차이는 최대 3배까지 납니다. 이런 누진제는 1974년 처음 도입됐습니다. 오일 쇼크 이후 전기 공급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수요를 조절하기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전기를 너무 많이 쓰는 가구는 '요금 폭탄'을 감당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대로 적게 쓸수록 요금이 크게 줄어드니까, 전기를 조금 쓰는 저소득층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도 고려했습니다.

45년 지난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전기 수급 면입니다. 민관합동 누진제 TF가 내놓은 안들을 살펴봅니다. 3가지 안 모두 전기 사용량이 많을수록 할인 받는 금액이 커집니다. 현재 450kWh를 쓰는 가정이 내는 전기 요금은 월 7만 270원입니다 민관합동 누진제 TF가 선택한 안이 적용되면, 7만 270원으로 500kWh, 기존보다 10% 이상을 더 쓸 수 있게 됩니다. 월 200kWh 넘게 사용하는 가구라면, 전기 수요량은 늘어날 뿐 줄어들 일은 없습니다. 애초에 요금 할인 정책이었으니 사용량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민간 전문가들과 산업부 관계자는 이제 전기 수급 걱정하던 시절은 지났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보전해주는 효과는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소득과 전기 사용량 사이의 상관 관계는 불분명합니다. 지난 4월 감사원 조사에 따르면 가장 저렴한 구간인 월 사용량 200kWh 미만 구간에 저소득 가구는 18.5%에 불과합니다. 같은 구간에 850만 원 이상 버는 가구도 10.8%나 됩니다. 월 사용량 200kWh 미만인 가구는 전기 요금을 4천 원씩 할인해주는 제도도 있습니다. 월 4천 원의 할인을 받는 가구 열 중 하나는 월 소득이 850만 원 이상인 셈입니다. 반면 가장 비싼 400kWh 초과 구간에서 월소득 150만 원 이하 가구 비중은 7.2%나 됐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전기를 필요 이상으로 쓰고, 소득이 적다고 전기를 안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보다는 몇 명이 함께 사는 지가 전기 사용량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큽니다. 2016년 에너지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월 평균 전기 사용량은 1인 가구 221kWh, 2인 가구 299kWh, 3인 가구 303kWh, 4인 가구 312kWh, 5인 가구 341kWh, 6인 이상 가구 445kWh였습니다. 구성원이 늘어남에 따라 함께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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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깎아주고 보자' 말고 필요한 곳에 혜택 돌아가는지 살펴야

전기료가 싼 구간을 늘려 요금을 할인해주자는 생각은 다소 무책임합니다. 받는 사람도 갸우뚱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산업부는 이번 요금 할인 방안이 시행되면 2천500만 가구 중 1천600만 가구가 연평균 2만 284원의 전기 요금을 덜 내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할인해준다니 마다하지 않을 뿐,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구가 꽤 포함돼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냉방권'이 보편적 권리라 누구나 보장 받아야 한다면 보장 받지 못하는 사람을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전기 요금을 감당하기 어려운 저소득층을 선별해 지원해주는 것이 합리적인 정책입니다. 사실 한전은 이미 이런 복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월 1만 6천 원, 차상위 계층은 월 8천 원씩 전기 요금을 할인해줍니다. 이런 종류의 정책을 강화하는 것이 보편적 냉방권을 보장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마땅한 근거 없이 수혜 대상의 범위만 늘리는 정책은 선심성, 인기몰이란 의심을 사기에 알맞습니다.

민관합동 누진제 TF가 내놓은 여름철 요금 할인 방안에는 냉방권 보장이 더 절실한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 방안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누진제 개편안'이란 이름을 내걸었지만 지금의 누진 구조가 바람직한가에 대해 고민한 흔적도 그다지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쓴 만큼 돈을 내는 것은 시장의 규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금을 깎겠다면 마땅한 명분과 재원이 마련돼야 합니다. 정부는 일단 소급 적용을 해서라도 올해부터 요금 할인을 시행하겠다고 호언했습니다. 과연 이번 요금 개편이 개선이 될지 개악이 될지 함께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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