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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취재파일] 경보기 오작동 월 771회…'양치기 소년' 된 화재 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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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잦은 비화재보로 애물단지 된 연기 감지기…성능 개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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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부', '똑게'.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의 줄임말입니다. 회사에서 상사는 똑똑하면서 게으른 "똑게"가 이상적이고, 부하 직원은 "똑부"가 좋다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세종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멍부" 부하 직원 때문에 아파트 관리과장이 10개월 동안 5명이나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참으로 난처한 이 "멍부"는 바로 집집마다 설치된 연기 감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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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핏하면 울리는 화재경보…원인은?

지난해 입주한 새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걸핏하면 울리는 화재 경보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세종시 보람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잦은 화재 경보로 생긴 과중한 업무 부담 때문에 입주한 지 10달 만에 관리과장 5명이 일을 그만뒀다고 합니다. 화재 경보가 울리면 관리사무소에서는 대피 방송을 하면서 세대를 방문해 화재 여부를 확인하고 못 쓰게 된 화재 경보기를 교체하거나 정비해야 합니다. 다른 업무를 보던 와중에도 매번 경보를 확인하러 세대 방문을 해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경보 때문에 뿔이 난 주민들의 원성까지 들어야 하는 겁니다.

주변의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1600여 세대가 입주한 세종시 다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 4월 13일부터 5월 12일까지 1달 동안 울린 화재 경보를 다 세어봤더니 모두 773건, 하루 평균 25번 꼴이었습니다. 취재진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경보가 울려 관리사무소 직원이 급히 세대를 방문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이 가운데 진짜 화재는 다행히도 한 건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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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화재 경보가 늘어난 걸까요? 773건의 '비화재보', 화재 경보기 오작동 가운데 딱 2건이 불 위에 올려둔 음식물 때문에 주방에서 울린 열 감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연기 감지기가 울린 것이었습니다. 강화된 소방안전기준에 따라 설치가 확대된 '연기 감지기'가 지나치게 부지런하게 일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 지난해 입주한 아파트부터 설치 확대

지난 2015년, 소방청 고시가 개정되면서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도 연기 감지기 설치가 의무화됐습니다. 기존 주택에 설치된 열 감지기는 온도의 갑작스러운 변화 등을 감지해 경보를 울립니다. 그렇다 보니 이미 불이 확대되고 나서야 경보가 울리게 되는 문제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좀 더 빠른 대피와 조치를 위해 불이 나기 전에 발생하는 연기도 감지할 수 있도록 더 비싸고 예민한 연기 감지기를 아파트에도 설치하게 한 겁니다.

좋은 일입니다. 주민들은 이제 불이 나면 더 빨리 알아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예민한 연기 감지기가 불에서 나는 연기 말고도 결로, 먼지, 번쩍이는 빛, 화장실에 오르는 김까지 화재로 인식하는 겁니다. 스팀다리미를 사용한다든가, 미세먼지가 많은 날 창문을 열었을 때,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물을 끓일 때, 샤워하고 화장실을 나왔을 때도 경보가 울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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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강화된 기준으로 설치 개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기존에는 한 방에 한 개 정도로 가구마다 4~5개의 열 감지기가 설치돼 있었다면, 요즘 지어진 아파트들은 15개 안팎의 감지기가 곳곳에 설치돼 있습니다. 더 예민한 감지기가 더 많이 설치되다 보니 오작동도 덩달아 많아진 겁니다.

2015년 고시 개정 이후에 사용 승인을 받은 아파트들은 지난해 상반기 무렵부터 입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에서 대규모 입주가 집중된 세종시에서 문제가 도드라졌습니다.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아파트가 세종시에서만 10여 개 단지, 2만여 가구가 넘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주민과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최근 늘어난 화재 경보기 오작동 문제에 대해 비교적 활발한 공론화가 이뤄졌습니다.

소방청에서 전문가와 제조회사 등과 함께 점검했는데, 특정 제품의 하자나 기준 미달은 확인하지 못했고 "생활환경의 문제"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소방청이 고시한 제품 기준에는 맞았지만, 우리 생활환경에는 맞지 않았나 봅니다.

● 양치기 소년 되어버린 화재 경보... 커지는 '불감증'이 더 걱정

연기 감지기가 작동하면 90dB 수준으로 시끄러운 경종이 해당 층과 위아래 층에서 동시에 울립니다. (천둥: 90dB, 기차: 100dB) 대피를 안내하는 자동 안내방송도 나옵니다. 그리고 관리사무실에서 조치할 때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오작동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어납니다.
▶ 한 달간 771회 울린 아파트 '화재경보'…실제 화재는 '0건'

처음엔 안내방송에 따라 대피하던 주민들도 오작동이 반복되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민들 스트레스 장난 아니죠. 그래서 어떤 집은 감지기를 다 떼어 달라, 소리 안 나게 해 달라, 관리소를 때려 부수겠다…. 어떤 주민은 관리소 직원들이 월급 인상하려고 쇼를 하고 있다고 그렇게 오해를 하세요." (다정동 00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아무리 불편해도 단 한 번 실제 불이 났을 때 제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똑게' 감지기보다는 '멍부' 감지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생활 불편은 둘째 치더라도 더 걱정되는 건, 진짜 불이 났을 때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경보기를 아무도 믿지 않게 되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처음 감지기가 울렸을 때는 놀라서 대피를 하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연기 감지기가 울리면 '엄마, 감지기 또 울려.' 그렇게 하고 그냥 자기 할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이래도 나가야 한다'고 얘기를 하고 싶지만 이게 오작동인 걸 아이들조차도 이제는 아는 거예요." (다정동 00 아파트 입주민 홍광기 씨)

보람동 모 아파트에서 6번째 관리과장을 맡은 박 모 씨는 업무 부담도 부담이지만 진짜 불이 나서 인명피해가 날 경우 져야 할 책임이 더욱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무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임의로 경보기를 꺼 두는 아파트 단지도 있다고 합니다. 화재 예방 시설을 임의로 차단하거나 폐쇄하면 법률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관리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적절한 대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안전 기준 상향이 불러온 부작용…개선책은 없을까?

취재를 하다 만난 홍광기 씨는 입주 1년 만에 집 안에 있는 연기 감지기 14개를 새 제품으로 갈았다고 합니다. 아직은 건설사가 교체 비용을 부담하고 있지만 조금 더 지나면 입주민이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작동은 시간이 지나면 기계에 먼지가 쌓이면서 더 잦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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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에서는 오작동을 예방하기 위해 6개월에 한 번씩 장비를 청소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첨단 자동 감지기를 주민이 일일이 떼어내서 관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전문 업체의 관리가 필요한데 업체나 시공사는 수수방관하고 있고 별다른 관리 규정도 없습니다.

정부와 소방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감지기 자체의 기술력을 높이고 오작동을 줄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실제 화재의 연기만 정밀하게 감지할 수 있는 아날로그식 감지기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주로 고층 빌딩이나 개인 주택에 설치되고 있다는데 그 가격이 10만 원대로 보급형 연기 감지기의 10배, 차동식 열 감지기의 30배가 넘다 보니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 대량 보급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작동이 주로 외부와 연결된 실외기실, 다용도실, 화재 대피공간 등에서 많이 일어나는 만큼, 이런 구역엔 열 감지기를 달 수 있게 하는 게 한 방법입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안전과 교수는 "획일적으로 집안 모든 곳에 연기 감지기 설치를 강제하기보다는 열 감지기나 연기 감지기의 특성을 잘 반영해서 그 공간 특성에 맞는,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감지기를 선택해서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합니다.

"열 감지기가 신뢰성 측면에서는 조금 더 높다고 판단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세대 내에서는 열 감지기 정도로도 충분히 피해 예방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외국 같은 경우도 그렇게 적용을 하고 있는 경우들도 있거든요. 반면에 공동 주택이라 하더라도 공용부라든지, 지하, 주차장 등 연기 감지기가 필요한 공간들이 또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은 연기 감지기로 하되, 세대 내의 감지기는 선택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영주 교수)

소방청도 급한 대로 침실과 거실을 제외한 세탁실, 실외기실, 다용도실 등에는 연기 감지기 말고 다른 감지기를 설치해도 좋다는 유권해석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기존 고시에 따라 이미 설치된 아파트에서는 교체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비용 문제도 문제거니와, 불편이 있더라도 소방청의 권고에 따라 더 안전한 감지기를 쓰자는 의견을 내는 주민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안전을 염려하는 주민들의 의견도 매우 타당합니다.

소방청은 올 하반기 중으로 공동주택 연기 감지기 설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장소의 특성에 맞는 감지기 설치 가이드라인이 나오면 주민들도 더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또 기술 기준을 올려서 감지기 성능을 개선할 종합 대책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여름만큼 올해도 더울 거라고 하는데요, 높아지는 습도만큼 화재 감지기 오작동도 더 많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짜증 나는 오작동도 줄이면서 화재 피해도 없이 안전한 여름을 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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