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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한국인은 모르고 일본인은 아는 백선엽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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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5성 장군 추대도 거론되던 한국전쟁 최고의 영웅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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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올해 99살인 그는 한국전쟁의 ‘최고 영웅’이자 살아 있는 우상이다. 한국전쟁 때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의 명예를 얻었던 그는 이명박 정부 때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 움직임에 힘입어 전인미답의 고지에 오를 뻔했다. 일부 군 원로와 재향군인 단체가 추대했고, 국방부가 관련 법령 개정까지 고려하며 검토했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단체, 학계의 반대가 컸고 결정적으로 “베트남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과 일부 한국전쟁 참전 군 원로들이 반대해 명예원수 추대는 무산됐다. 그의 만주군·간도특설대 경력과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동북항일연군)을 토벌했던 사실 때문이다.(“군 원로들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다”, <경향신문> 2017년 2월5일치) 그는 일본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들에서 항일연군을 ‘게릴라’로 칭하면서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도 독립이 빨라졌다고 할 수 없었을 것”(<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 29쪽, 1993)이라고 했다. 자신의 과오에 대해 변명했을 뿐 사죄하지 않았다.

명예원수 추대 무산이야 백선엽에게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의 기억, 말과 글이 이미 그 자체로 한국전쟁의 역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6월24일부터 방영된 한국전쟁 특집 다큐 2부작 <전쟁과 군인>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방송 제작과 방영 전부터 KBS 노조와 시민사회의 반대가 심했다. 제작진은 백선엽을 영웅화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다루겠다 했다. 그러나 “백씨의, 백씨에 의한, 백씨를 위한 방송”이었고 영웅 미화 방송이었다.(‘KBS 친일파를 영웅으로… 시청자 경악 친일 방송 축하’, <미디어오늘> 2011년 6월25일치)

간도특설대 언급조차 안 한 방송



백선엽이 깜깜한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오고 큰 화면을 보며 당시 미군이 찍은 영상을 보면서 “기억나요” 하면서 시작하는 전쟁에 대한 그의 말은 “이게 바로 ‘한국전쟁’의 이야기고 역사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방송은 자신이 직간접으로 관여한 일부 신화화된 전투들(다부동전투, 평양 점령, 운산전투, 대관령전투, 임진전투 등)을 중심으로 배치됐다. 한국군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의 대명사인 현리전투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는 과오를 말하는 대목에서 스스로 한국군을 대표한 시각에서 말하거나 자신이 지휘하는 예하 부대 또는 일부 장병의 실패로 이야기한다.

방송에서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 일본군 장교가 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는 몇 초 정도의 멘트가 전부였다. 간도특설대 경력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모르는 게 없었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의 시각에서, 유엔군의 시각에서 그려내는 몇몇 전투 영웅담이 주를 이루었고, ‘호국’을 위해 “부수적으로 희생”된 일부 학생과 양민은 양념처럼 언급됐다. 군인보다 민간인의 피해가 훨씬 큰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실은 철저히 ‘사각화’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들이 바로 그 전투 영웅담 이면의 참혹한 현실, 민간인의 대량 피해를 대면하고 응답했지만, 정작 핵심 관계자인 백선엽은 이를 외면했다.

백선엽의 영향력이 한국전쟁의 공식 전사(戰史)·군사(軍史) 서술에 미치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있다. 그동안 대표 공식 전사는 1960~70년대 간행된 <6·25전쟁사> 시리즈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군편)는 이것을 2003년부터 11권으로 증보 개정하는 편찬 사업을 했다. 2004년 1권 발간을 시작으로 2013년 11권이 발간 완료됐다. 군편은 새로 조사된 미국·소련·중국 등의 자료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국내외 연구 성과를 반영하면서 그간 집적한 연구 역량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데 군편 자문위원장이자 새로운 <6·25전쟁사> 편찬 자문위원장인 백선엽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제기됐다. “백선엽이 전쟁 초기의 전사를 임의로 개작해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유리하도록 서술케 했다”든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이적 행위를 감추기 위해 <채병덕 장군 평전>을 출간케 하여 이적 행위 하나하나를 변명”으로 감싸안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인터넷 카페 ‘박경석의 서재’) 심지어 이를 폭로한 박경석 장군은 <6·25전쟁사> 1·2권 자문 명단에 자기 이름이 올랐지만 실제 자문한 바 없다고 해 파문이 일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새로운 공식 전사 서술의 신뢰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전쟁사가 전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적 시각이 강하게 투영되다보니 집필 주제와 시기 구분, 연구진 구성이 편향적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거기에 백선엽 ‘자문’의 영향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니 그의 기억과 말이 곧 공식 전사이고, 그래서 그가 영웅화·신화화한 것이라는 세간의 소문이 심각하게 다가온다.

군의 위기감에서 나온 ‘전쟁기념관 건립’



안 그래도 백선엽이 곧 전쟁기념관이라는 평가가 있던 터였다. ‘6월25일’에서 비롯한 위기를 공간적으로 재현한 전쟁기념관의 외부 전시물과 6·25전쟁실 1·2·3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끝없이 상기시키며 ‘호국’을 위해 국민에게 ‘육탄’이 될 것을 웅변한다. 전쟁이 난 것을 기념하는 공간 전시의 끝은 호국정신과 힘에 의한 평화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걸어다니면서 끊임없이 말하는 ‘전쟁 영웅’이 바로 백선엽이다.

백선엽은 전쟁기념관 건립에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해방 후 38선 분쟁, 공비 토벌, 한국전쟁, 베트남 파병의 수많은 전투 속에서 순국한 많은 사람들을 모실 수 있는 시설이 서울에 없다는 것을 두고 우리들이 태만”한 결과라고 했다. 그러다 육군본부의 계룡산 이전이 기회가 되어 “오랫동안 같은 생각을 해왔던 대통령 노태우 장군의 제안”으로 육군본부 자리(서울 용산)에 기념관 건설을 추진하게 된 것을 높이 평가하고, 그 자신도 민간 쪽 회장으로 이 사업에 참여한 것을 염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소회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사업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결집”됐고, 건립을 위해 전 국민적 운동이 있었다고 자평하면서, 비록 건군 이래 군을 둘러싸고, 또는 군에 의해 여러 불상사가 있었지만, 이 운동의 확산이야말로 국민이 군을 신뢰한다는 증거 아니겠느냐고 평가한다.(<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437~438쪽, 2000)

현실은 그의 자평과 달랐다. 기념관 건립 사업은 국방부가 주관하되 정부는 지원하고 ‘참전 용사’의 자발적 활동을 표면적으로 내세워 전 사회적으로 추진하려 했지만, 실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부와 군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전쟁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후 전쟁기념사업회)는 사실상 국방부와 군이 통제 관리했다. 건립 예산 1246억원도 국방예산에서 충당됐다. 애초 계획은 건립에 필요한 예산의 많은 부분을 자발적 성금으로 충당하려 했지만 참여가 저조해 20억원 정도 모금됐다. 전쟁기념관의 주체가 사실상 국방부와 군이고 “이러한 주체의 존재 기반인 적과 나를 구분하는 적대성과 배타성, 보안을 위해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조직, 정보의 비개방성과 폐쇄성, 상명하달, 지배와 복종의 위계성과 일방성이 기념관의 형식과 내용”(‘냉전의 공간화와 기호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중심으로’, 최선영, 32쪽, 2016)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를 두고 “국민이 군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6·25전쟁의 뒷면이 알려지던 때



1964년부터 전쟁기념관 건립 논의는 시작됐지만, 1988년 “대통령 노태우 장군의 제안”과 국방부·군의 합심으로 건립을 강력히 추진한 배경에는 군의 위기감이 있었다. 이는 백선엽의 위기감이기도 했다. ‘한국동란기념사업계획’(1988년 7월)의 건립 목적과 주요 내용을 보면 쉽게 확인된다. 1987년 민주화운동이 한반도 통일과 평화 요구로 확산되자 노태우 정부가 이를 안보 위기로 판단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옮기자면 “지금의 상황이 6·25전쟁의 기억이 흐릿해져가는 동시에 좌경운동 세력 등의 북침설이 일반화되고 있다고 판단되어 이를 차단하고 전후 세대에게 6·25전쟁이 북한의 남한 침략임을 정확히 알리고 이 전쟁에 민족사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반공안보 의식과 바른 역사관을 전 국민에게 내면화하고 안보 공감대를 확산시키며 참전 용사의 무공과 애국심을 고취시켜 민족 통일을 이루겠다”(최선영, 35~36쪽)는 것이다.

이는 백선엽이 1988년 6월24일치 <경향신문> 지면을 빌려 ‘군과 나’를 연재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경향신문>의 연재 기획 의도는 “6·25 38주년을 맞아 통일 문제와 한-미 관계가 국가적인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창군, 한국전쟁, 전후 재건기, 한-미 군사외교 주역의 한 사람이자 산증인인 백선엽 장군의 회고”를 받아 “공과 과를 기억이 허락하는 한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연재 배경과 관련해 몇 마디 추가한다면, 그즈음 1987년 민주화 이후 브루스 커밍스 등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 연구 결과와 한국 학자들의 새로운 한국전쟁사 연구 성과가 대중적인 출판 성과로 이어졌던 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태의 <남부군> 같은 ‘빨치산 전쟁 수기’도 출간되면서 그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전쟁 양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분단문학, 전쟁문학의 출간도 활발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폭동’의 섬으로 규정됐던 제주도에서 ‘제주4·3’ 40주년을 맞아 제주4·3 사건 진실 규명 운동이 물밑에서 올라왔던 해다. <제주신문>에서 장기 기획 ‘4·3의 증언’(1989년 4월3일 연재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4·3 취재반을 구성한 것이 1988년 3월이었다.

백선엽 회고록은 매주 1회 연재됐고, 1989년 4월27일 41회 연재로 끝났다. 5월11일 42회 “장기 연재를 마치며 좌담”회를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고, 백선엽판 ‘6·25전쟁’ 대서사의 시작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격이 이 정도에서 멈출 리 없었다. 그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한 창군 원로 중 하나였던 백선엽이 이때부터 이 반격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989년 6월 한국전쟁 39주년을 맞아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가 대륙연구소에서 출판됐다. 그해 12월 “대한민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켜온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 성우회(星友會)가 만들어졌고, 초대 회장에 백선엽이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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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 경력을 추가한 일본판 <군과 나>



<군과 나>는 미국과 일본에서 곧바로 번역 출간됐다. 미국에서는 1992년 <부산에서 판문점까지: 한국의 최초 4성 장군의 전쟁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한국어 책을 그대로 영어로 번역했고, 백선엽의 전우인 유엔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과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서문을 썼다. 그의 책은 일본에서도 2000년 5월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한국판과 달리 평양 출생부터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성장했고, 왜 군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썼다. 특히 봉천군관학교, 만주군과 간도특설대 경력을 자랑스럽게 긴 분량을 할애해 쓰고 있다. 한국판에 없는 내용이다. 백선엽에게 일본 독자층을 대상으로 회고록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흥미로운 점은 <경향신문>에 한창 연재 중이던 1988년 8월 이미 <한국전쟁 천일, 백선엽 회고록>이 일본에서 출간됐다는 것이다. 1993년 3월에도 <대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가 일본에서 나왔다. 두 책에는 백선엽의 만주군과 간도특설대 경력 내용이 있지만, 한국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 독자보다 일본 독자가 자신의 삶과 전쟁을 더 잘 이해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일까.

당시 <정일권 회고록> 말고는 핵심 군 장성의 회고록이 많지 않았던 한국적 상황에서 백선엽의 회고록은 큰 주목을 받았다. <군과 나>는 군사 연구에서 반드시 참고하는 중요 문헌이 되었다. 그런데 이 회고록은 유사품이 여럿 있다. 2010년부터는 한 유사품이 오리지널 전작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2010년 1월4일부터 <중앙일보>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277회 연재한 글을 묶은 책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백선엽 장군의 6 25전쟁 이야기, 1128일의 기억>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명예원수 추대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였다. <군과 나>에서 평양 일착 입성을 말하며 짧게라도 언급했던 만주군과 간도특설대 이력의 소회를 밝혔던 대목은 많은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미·중(G2) 시대로 접어드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해서인지, 새로운 회고록은 <군과 나>를 저본으로 하되, “중공군과의 조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50년 10월에 참전한 중국을 “전쟁의 판도를 바꾼 존재”로 부각하고 있다.

지난 6월 현충일 추념식 때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와 한-미 동맹의 토대가 약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면서 완성된 광복군임을 선언했다. 이는 2016년 12월 전쟁기념관의 전쟁역사실 2관 재개관 때 새롭게 구성되며 선보인 국군 족보(계보)다. 그걸 두고 자유한국당은 광복군은 보지 않고 그걸 가리키는 김원봉만을 문제 삼으면서 그를 ‘6·25 남침’의 김일성 주구(앞잡이)로 취급했다. 황교안 대표는 백선엽을 예방했다. 그 자리에서 백선엽은 2013년부터 <프리미엄 조선>에서 연재한 것을 묶어 출판한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을 선물했다. 백선엽을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삼고 그의 기억, 말과 글을 역사로 삼겠다는 이벤트로 비쳤다면 과도한 생각일까.

이에 대해 비판적인 여당과 역사학계, 시민단체들이 만주군과 간도특설대로 복무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토벌했던 백선엽의 과오를 부각하면서 친일파 프레임을 걸었다. 이런 구도에서 반론은 예상된 것이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이 한국전쟁에서의 공로가 그 과오를 덮고도 남는다는 식의 주장이다. 불굴의 의지와 위대한 승리로 백선엽이 공산화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했다는 것이다. 이걸 미국도 인정하고 그를 깊이 존경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의 공로가 과오를 덮는다?



백선엽이 기억하고 말하는 한국전쟁의 역사가 진지하게 종합적으로 검토된 적이 없다. 그가 관여했고 승리해 자랑스러워하는 전투의 이면에서 사각화한 이야기를 길어올리면서 전쟁의 진짜 참상이 무엇인지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말하는 듯 보이는 그의 방법과 미국·일본에 대한 인식과 태도도 다각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봐야 한다. 그러려면 다음 연재에서는 대표적으로 낙동강 방어 때 대구 정면에서 적을 막아낸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 후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한 것, 그의 이름을 딴 백야전전투사령부의 ‘공비’ 토벌을 중심으로 영웅 신화화한 그의 공로의 ‘사각’(blind side)을 재조명할 것이다.

백선엽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라는 용산 전쟁기념관에 새겨진 문구를 곧잘 인용한다. 문제는 그 전쟁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다.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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