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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나에서 너, 우리로 넓어지는 이야기 '소설 바깥의 김애란'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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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펴낸 소설가 김애란을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최근 관심사에 대해 “나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중간 세대로서 감각하는 몸과 마음의 변화에 관심이 있다”며 “단편에선 주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면, 장편에선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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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타자소리 같은 어머니의 도마 소리가 들리는 식당에 딸린 작은 방, 야광 별이 희미하게 빛나는 천장이 높고 깊은 자취방에서 대가리가 큰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쓰는 모습…. 김애란(39)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열림원)을 읽고 나면 선연히 떠오르는 장면이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서 시작해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인생>, 2017년 펴낸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이르기까지 소설가 김애란을 만든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작가가 쓰지 않은, 그러나 드러난 문장을 받쳐주는 ‘문장 바깥의 문장들’”이란 책 속 구절처럼, <잊기 좋은 이름>은 ‘소설 바깥의 김애란’을 만나기 맞춤한 책이다. 김애란을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2000년대 ‘젊은 작가’의 최첨단에 섰던 김애란의 이력에 비해 산문집은 늦게 도착한 편이다. 등단 17년 만에 엮어낸 이번 산문집은 풋풋하고 발랄한 김애란부터 타자와 사회에 대해 조심스럽고도 깊게 사유하는 원숙해진 김애란까지 두루 만날 수 있다. 김애란은 “어릴 때 낙관과 긍정에서 오는 따뜻함이 있었다면 지금은 삶에서 느끼는 실망과 회의와 의심을 지나고 나서 간직하게 된 한 줌의 따뜻함이 있다. 온도는 낮아졌을지 모르지만 이것도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산문집은 ‘나’에서 ‘너’, ‘우리’로 이야기를 확대해간다. 김애란의 작품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과 닮았다. 인상적인 건 ‘김애란을 만든 8할’인 가족의 이야기다. 20년간 밀가루를 만지며 기름기 하나 없는 손을 갖게 된 어머니의 고되지만 ‘경제권을 쥔 여자의 자신만만함’의 긍지로 빛났던 얼굴, 동네 점방에서 화투의 일종인 ‘뽕’을 치며 첫만남을 가진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따스하고도 재치있게 그려진다.

“어머니의 삶의 자세들이 몸에 스며서 저와 작품에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강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힘들 때 농담했던 모습이에요. 농담을 들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안심이 됐어요. 엄마가 동물적으로 품위를 지키는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제 초기작들의 유머에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대학 시절 헌책방에서 산 <언어학사>라는 책과 관한 일화도 흥미롭다. 책의 내용보다 책 사이에 끼여 있던 수강신청서의 주인 커플에 더 흥미를 보였고 끝내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산문집 전반엔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와 고민이 엿보인다.

“문학은 상투성에 대항하는 작업 같아요. 상투성은 게으름이에요. 지적인 게으름이기도 하고 삶의 자세의 게으름이기도 하죠. 상투성의 반대편에 서서 이면을 모색하는 것이 작가들의 작업이에요. 작가로서 좋지 않은 점은 단어나 문장들이 훼손되는 느낌이 들 때에요. 어떤 말들이 너무 낭비되거나 상투화되어서 쓰일 때 사람들이 들어보기도 전에 싫증내고 물러서게 되죠.”

김애란은 ‘낭비되는 단어’로 소통이나 미래 같은 ‘크고 좋은 말’들을 꼽았다. “정말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나 현재를 지워버리기 위해 쓰이는 ‘미래’, 정말 그 가치를 우선시해서가 아니라 다른 가치를 지워버리기 위해 쓰는 ‘더 나은’ 같은 말”이라고 덧뭍였다.

최근 위험수위에 오른 혐오나 차별의 언어에 대한 사유도 엿보인다. 그는 강남역과 구의역, 안산 세월호 임시분향소에 붙은 포스트잇을 보며 말한다. “거기 적힌 말들은 나의 타자를 중심과 바깥,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지 않는 말”이라며 “동시대의 혐오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덮어주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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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애란.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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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글들이 함께 엮였다. 2014년 4월 이전과 이후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언어를 다루는 방식은 결코 같을 수 없었다. “4월 16일 이후 누군가에게는 ‘바다’와 ‘여행’이, ‘나라’와 ‘의무’가 전혀 다른 뜻으로 변할 것이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라 말하고 뮤지컬 <서편제>의 ‘심청가’를 듣다 심봉사가 “무남독녀 외딸 하나 물에 빠져 죽은 지가 우금 삼년인디” 말하는 장면에서 울어 버리기도 한다. 김애란은 단편소설 ‘입동’에도 아이를 잃고 보상금 때문에 눈총받는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세월호 유족의 아픔을 담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 이야기도 있는 산문집에 함께 엮는 것이 조심스러웠다”며 “나와 사회에 너무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어서 넣게 됐다. (독자들이) 이 기회에 한 번 더 생각해주셔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산문집에서 그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이해’란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고 말한다. 김애란은 “예전엔 이해나 공감에 대해 당위적으로 말한 적도 있는데, 버스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털썩 앉아놓고 헌신하는 것처럼 말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라는 말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때 등단해 주목받으며 ‘최연소’라는 수식을 받곤 했던 김애란도 이제는 ‘중견 작가’가 됐다. 그는 “문학도 사회 속에서 쓰는 글이고, 사회적 욕구와 문학의 욕구는 상호작용한다”며 “사회적으로 합리성과 냉철함에 대한 요구가 큰데 이건 그만큼 결핍되어 있다는 얘기”라며 “문학 제도나 시스템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반성하는 목소리들과 변화를 모색하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 할 말을 신중하게 고르며 말을 이어나가는 김애란은 소설 속 인물들과 꼭 닮았다. ‘문학동네’ 여름호에 발표한 단편 ‘숲속 작은 집’에선 에어비앤비 숙소를 배경으로 주인인 백인 남자, 한국인 부부, 청소를 하는 현지인을 통해 계급과 언어에 스민 중층적인 권력과 갈등을 그린다. ‘메이드’라고 불러야 할지, 팁을 준다면 얼마를 어떻게 어떤 메시지와 함께 줘야할지 고민하는 여자의 모습은 어떤 말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할지 고민하는 김애란과 겹친다.

산문집 제목을 ‘잊기 좋은 이름’으로 한 까닭을 물었다. “세상에서 약하고 옅은 이름들이 먼저 지워지니까요. 그런 이름들을 기억하거나 호명하는게 글쓰기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산문집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우리가 잊었거나 잊은 척 하는 것들을 섬세하고도 따뜻하게 복원해내는 김애란이 그려낼 다음 풍경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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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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