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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내 베트남 친구는 살해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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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1일, 잠시 베트남에 머물던 서보라씨(가명·귀화·당시 28세)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언니 홍모씨(당시 30세)에게 연락을 했다. “언니 저 오늘 한국 들어가요.” 서씨와 홍씨 모두 한국에 귀화한 베트남 이주여성이다. 홍씨는 마침 한국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길이 엇갈린 이들은 “한국에 돌아가서 만나자”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두 사람은 전남지역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며 친해졌다.

사흘 뒤인 7월 24일 서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지리산에 위치한 도로 옆 13m 절벽 아래로 추락한 승용차 안에서다. 홍씨는 베트남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홍씨가 베트남 현지의 서씨 가족을 찾아갔다. “보라가 한국에서 죽었대요. 어머니가 저랑 같이 한국으로 가요.” 서씨의 아버지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이들은 아버지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백만송이 장미>를 잘 불렀던 보라씨

경찰은 서씨의 남편이 주요 용의자라고 말했다. 사고 지점이 급커브 지역이 아니고, 사고 위험지역도 아니었다. 또 차량이 가드레일의 비좁은 틈으로 추락한 정황이 의심스럽다고도 했다. 부부가 함께 차로 이동한 행적도 발견됐다. 서씨 남편은 남원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서씨의 어머니가 사위에게 다가갔다. “혹시 너 아니지? 니가 죽인 거 아니지?”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서씨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오빠와 여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는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했다. 집에는 수술을 받을 만할 돈이 없었다. 겨우 10대인 서씨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동네에는 한국 남자와 결혼한 언니들이 많았다. 남편과 사이가 좋고 이런저런 사업으로 돈을 잘 버는 사람도 있었다. 서씨는 19살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과는 16살 차이였다.

국제결혼 업체를 통한 만남이었지만 서씨는 남편의 선한 인상이 괜찮아 보였다고 주변에 말하곤 했다. 한국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부모님을 뵀다. 그러나 서씨를 본 시부모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편이 부모님께 국제결혼을 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를 한 것이었다. 게다가 세 번째 결혼이었다. 서씨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법적으로는 남편이 기본정보를 속이고 결혼했을 경우 중개업체가 사기성 알선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한국인은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해 보상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주여성은 결혼이 사기라고 문제제기를 해본들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인신매매방지법이 없는 상황에서 사기나 기망에 의한 결혼은 이혼사유가 되지만 서씨와 같은 이주여성은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서씨는 대한민국에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홍씨처럼 한국어 강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서씨는 한국에 온 지 몇 년 만에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가 됐다. 한 달에 100만원 정도를 벌었다. 서씨는 심수봉의 노래 <백만송이 장미>를 잘 불렀다.

서씨를 난감해하던 시부모도 활발하고 싹싹한 그를 받아들였다. 남편의 할머니가 서씨를 특히 아꼈다. 서씨는 한국어 강사로, 남편은 구청 계약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적은 돈이었지만 시부모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크게 돈 쓸 일은 없었다. 몇 가구 살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 그렇게 일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커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이 사는 곳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다. 도시에서는 흔한 어린이집조차 없었다. 또래 아이 한 명 없는 마을이었다. 서씨 부부는 읍내로 나가 살기로 했다. 읍내 생활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월세, 어린이집, 생활비 등으로 지출이 늘었다. 돈이 늘 부족했지만 남편은 서씨와 상의도 없이 주변에 쉽게 돈을 빌려줬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부부는 자주 갈등을 빚었다.

서씨는 월세가 아닌 집에 살고 싶었다. 아이를 좋은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어 강사를 그만두고 육가공품 공장에 취업했다. 두 배 가까운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일에는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주말에만 집에 왔다. 대신 서씨 어머니가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사위와 손자를 챙겼다. 남편은 서씨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대충’ 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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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회원들이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사망한 故 탓티황옥 추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세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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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아래로 차 밀어 교통사고로 위장

결혼 7년 만에 서씨는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부부는 별거를 결정했다. 그즈음 베트남의 아버지 병세가 악화됐다. 서씨는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베트남으로 갔다. 남편은 병원비에 보태라며 2000만원을 건넸다. 홍씨는 “2000만원이 큰 돈이긴 하지만 보라가 한국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생각하면 위자료도 안 된다”고 말했다.

서씨는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첫날, 광주에 사는 베트남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휴대전화가 없던 서씨에게 개통된 휴대전화 하나를 건넸다. “보라야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전화기로 경찰에 신고하고 나한테도 연락해.”

서씨는 아이부터 만나러 갔다. 아이는 시부모님과 함께 있었다. 소식을 들은 남편이 부모님 댁으로 왔다. 서씨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거부했다. 말싸움이 몸싸움이 됐다. 여기서부터는 경찰 수사 결과 밝혀낸 사실들이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남편은 돌로 서씨를 수십 차례 내려쳤다. 서씨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은 인근 호수에 서씨를 던졌다. 하지만 몸이 곧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이번에는 서씨를 차에 태운 다음 밤이 되도록 기다린 뒤 지리산의 외진 길로 차를 운전해갔다. 산림 관련 일을 하던 그는 지리산 지리를 잘 알았다. 그리고 서씨만 차에 남겨둔 채 절벽 아래로 차를 밀었다. 교통사고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20㎞를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곳곳에서 외상이 발견됐고 타살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냈다. 사망시간은 남편이 서씨를 차에 태운 이후로 추청된다고 했다. 돌로 맞고, 호수에 빠진 후에도 숨이 붙어 있었다는 얘기다. 국과수의 소견을 들은 서씨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남편은 무죄를 주장했으나 국과수 결과와 폐쇄회로TV(CCTV)가 발견되자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베트남 외조부모 “손자, 한번이라도 보고싶어”

그 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차에서 이틀 동안 방치된 서씨의 시신은 많이 훼손돼 있었다. 어머니는 딸의 시신을 보지 않았다. 홍씨가 사고 현장 사진과 서씨 시신을 확인했다. 홍씨는 “일이 마무리되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졌다. 이주여성 친구들과 한국인 친구들이 십시일반 부의금을 냈다. 563만원이 모였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서씨 어머니가 딸의 남편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홍씨와 어머니가 전주교도소를 찾았다. “내가 너한테 밥을 해먹였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아꼈는데 왜 내 딸을 죽였어? 대체 내 딸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어?” 남자는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라고 했다. 이어 “나중에 제가 찾아가서 사죄하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1심에서 징역 18년을, 2심에서 감형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전남의 한 시골 마을에 산다. 부모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이는 모른다. 엄마는 아파서 세상을 등지고 아빠는 외국에 있는 줄로 안다. 서씨 가족은 딸의 죽음이 억울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의 핏줄이 걸려서 사건을 가슴에 묻었다. 서씨는 생전에 아이를 데리고 종종 베트남을 찾았다.

홍씨는 가끔 아이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아이의 소식을 베트남에 전해준다. 베트남의 외조부모는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아이를 보고 싶다고, 아이를 데리고 베트남으로 와줄 수 없느냐고 매번 홍씨에게 부탁한다. 아이가 베트남에 온다면 서씨의 시신이 묻힌 장소에 데려갈 생각이다. 서씨의 동생은 언니의 죽음 이후 결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홍씨가 언론사 인터뷰에 어렵게 응한 것도 이런 이유다. “보라가 죽은 이후에도 가족들이 아이한테 문제 생길까봐 조용하게 있었잖아요. 돈이 없어서 못간다면 단체나 기관이 지원을 해서라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아이를 만날 수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이 부분을 기사에 꼭 써주세요.”

생전에 서씨는 페이스북 활동을 열심히 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며칠 전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사진 속 서씨는 손으로 하트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다음 날 광주에 도착했다는 글을 올렸다. 서씨가 올린 게시물은 그게 마지막이다. 동생은 얼마 전 서씨의 페이스북에 ‘보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7월 24일은 서씨의 사망 5주기다.

광주|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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