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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세금까지 써가며 언제까지 ‘아가씨 타령’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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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지역 미인대회 논란

수영복 입고 벌이는 ‘미스 변산’ 등

미인대회 1년새 전국 10곳 열려

고추·한우·포도아가씨 등 줄줄이

중앙·지방정부 예산 10억여원 지원

10대 고교 재학부터 지원 가능

취업시장 ‘스펙’으로도 활용돼

지역 기업·기관들 이해관계 얽혀

시민들 “이제는 그만…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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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일 열린 ‘2019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참가자들이 입은 한복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달궜다. 노출이 심한 수영복 심사가 성 상품화 논란을 일으키자 이를 폐지하며 한복으로 패션쇼를 한 것인데, 이 또한 선정성 논란을 비켜 가지 못했다. 미스코리아 대회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역 홍보를 명분으로 한 지역 미인대회가 예산까지 투입돼 여전히 열리고 있다.



“저를 아름답게 해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 드립니다. 무거운 왕관의 무게만큼 열심히 변산 홍보에 힘쓰겠습니다.”

지난해 7월28일 전북 부안군 변산해수욕장에서 열린 ‘제29회 미스 변산 선발대회’에서 최고 순위인 ‘진’에 오른 문아무개씨는 남색 수영복을 입고 반짝이는 은색 왕관을 쓴 채 수상 소감을 밝혔다. 문씨는 2박3일 합숙을 거쳐 본선에 진출한 19명과 함께 댄스, 스피치, 워킹 등을 선보인 뒤 최종 우승자가 됐다. 이날 본선대회에 참가한 여성들은 두 시간 가량 이어진 무대에서 높은 하이힐에 줄곧 수영복 차림이었다. 이들은 중간중간 율동을 선보일 때 교복이나 미니스커트 등을 ‘걸치기도’ 했지만, 이 차림으로 해변의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를 이어갔다.

‘진’ 자리를 놓고 마지막까지 경쟁을 벌인 ‘선’ 수상자에게 트로피를 안겨준 시상자는 권익현 부안군수였다. 군수는 이날 축사에서 “멋진 대회를 매번 개최하는 주최사(전북도민일보)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대회 심사위원장은 최정호 전북 정무부지사가 맡았다. 부안군의회 의장, 지역 건설회사 사장, 지역 성형외과 원장, 전북여성단체협의회장, 전북여성경제인연합회장 등 이른바 ‘지역 유지’들도 시상자로 무대에 나왔다. 부안 바다의 아름다움을 전국에 알린다는 취지로 1989년부터 시작된 이 대회는 16살부터 26살까지의 미혼 여성들만 지원할 수 있다. 올해 30회를 맞아 오는 27일 변산해수욕장에서 또 열릴 예정이다. 이 대회엔 전북 부안군이 5000만원의 예산을 지원한다.

성을 상품화하고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미인대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실제로 국민의 성평등 의식이 높아지면서 수십개의 미인대회가 폐지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미스 변산 선발대회와 같은 형태의 미인대회가 ‘지역축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전국 10곳에서 열린다. 또 이러한 대회에 들어간 중앙·지방 정부의 예산은 최근 1년 사이 약 1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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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으로 시민 외모 서열 매기기?

미인대회 반대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아가씨’라는 명칭을 내세운 지역 미인대회가 100여개 존재했다. 2002년 7월 시민단체 연합으로 열린 ‘미인대회를 통해 본 지역축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집계한 전국 미인대회만 99개였다. 이 중 지자체 예산이 투입된 미인대회는 43개, 2002년 기준으로 이미 폐지됐거나 지자체 예산이 들어가지 않는 미인대회는 56곳으로 나타났다. 당시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2001~2002년 전국 지자체들이 미인대회에 지출한 예산은 총 12억여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토론회에선 “대한민국은 ‘○○아가씨 공화국’”이란 개탄도 나왔다.

17년이 지난 2019년,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겨레>가 각 시청과 군청, 행사 주최 단체 등을 통해 취재한 결과(표 참조),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거나 지역 알리기 일환으로 지난해와 올해 사이 개최된 전국 미인대회는 ‘김천포도아가씨’(경북 김천시 예산 9000만원), ‘영양고추아가씨’(경북 영양군 예산 2억2000만원), ‘영천포도아가씨’(경북 영천시 예산 5600만원), ‘안동한우홍보사절선발대회’(경북 안동시 예산 8000만원), ‘전국춘향선발대회’(국비 2억900만원), ‘아랑규수선발대회’(경남 밀양시 예산 1010만원), ‘미스 변산 선발대회’(전북 부안군 예산 5000만원), ‘사선녀 선발 전국대회’(전북 임실군 예산 2억원) 등이었다. 시 예산이 들어가지 않지만 지역 미인대회 구실을 하는 군산의 ‘새만금벚꽃아가씨’도 28회째 꾸준히 개최되고 있다.

경북 영주시 ‘풍기인삼아가씨’ 대회는 2017년 3000만원이 지원되며 지속되다가 지난해부터 열리지 않았다. 지난해 대회 날짜가 10월21일로 정해지고 포스터까지 만들어졌지만 지역에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결국 취소됐다. 반면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미인대회를 강행한 경우도 있다. 지난 5월 경남여성단체연합은 “경남 밀양시 ‘밀양아리랑대회’의 아랑규수선발대회를 폐지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아랑규수의 정절을 기린다’는 대회의 취지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해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아랑규수 선발대회는 밀양시 예산 1010만원을 지원받아 지난 5월19일에 열렸다.

이 같은 대회들은 대체로 신청 자격을 ‘18~24살 미혼 여성’(영양고추아가씨), ‘17~25살 미혼 여성’(사선녀 선발 전국대회)’ 등 젊은 미혼 여성으로 한정한 뒤 예선과 본선, 합숙 절차를 거쳐 외모, 말하기 솜씨, 장기자랑 등 여러 항목을 평가한다. 수상은 ‘진’ ‘선’ ‘미’ 등 서열을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당수의 대회들이 지원 자격을 ‘고교 재학 이상’이라고 정해 10대 미성년자도 지원할 수 있게 했다.

미인대회들은 국가 예산이 소요됨에도 정부(지방정부 포함)가 각종 사업을 실시할 때 성차별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시행하는 성별영향평가의 의무 대상은 아니다. 각 지역축제를 관할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양성평등정책담당관실 관계자는 “대회의 성별영향평가는 지자체장이 하게 돼있는데 의무사항은 아니며 여성가족부와 협의해서 정하도록 돼있다”고 말했다.

여성의 성 상품화 논란을 피해가기 위해 표면적으로 ‘미인대회’를 내세우지 않고 ‘향토 문화 육성’, ‘지역 경제 살리기’ 같은 지역 축제와 결합해 열리는 대회도 있다. 지난해 10월 개최된 ‘안동한우 홍보사절 선발대회’가 그렇다. 언뜻 지역의 한우를 홍보하는 이를 두루 뽑을 것 같지만, 지원 대상을 18~28살 미혼 여성으로 제한하고 ‘진’ ‘선’ ‘미’ 같은 서열이 매겨져 내용적으론 미인대회와 다를 바 없다. 경북 경산시가 지원하는 ‘경산대추알리미’는 과거 여성만 뽑았던 대추아가씨 선발대회를 개선해 2017년부터 명칭을 바꾸고 남성도 지원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2017년 주요 수상자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다. 윤소영 경남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은 “비판을 의식한 지방자치단체들이 ‘미인대회’임이 드러나는 명칭을 쓰지 않고 각종 문화 행사, 지역 축제에서 비슷한 성격의 대회를 지속하고 있어 현황 파악조차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정부 예산이 적절히 쓰였는지 감시하는 시민사회는 미인대회가 지방자치단체의 이미지 향상이나 특산물 홍보에 과연 효과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 선발대회만 개최하고 수상자들이 특산물 홍보 활동에 임하지 않는 경우도 상당했다. 채연하 ‘함께하는 시민행동’ 예산감시국장은 “관행적으로 수십년째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데 행사를 통해 얻게 되는 홍보 효과에 대해 지자체가 명확히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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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대회 준비해주는 학원가

채용과정에서 외모가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직업군을 준비하는 20대 취업준비생들은 미인대회 준비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다. 입상하면 이력서에 경력란을 채워 ‘채용에 조금이나마 도움될까’ 하는 마음에서다. 미인대회 준비생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회원 수는 6천여명에 이른다.

취업준비 학원가에서는 ‘○○대회 준비반’이나 ‘1대1 코칭’ 등을 열어 이미지 메이킹, 스피치·면접, 워킹·포즈, 개인 장기자랑 지도 등을 해주고 수십만원을 받는다. 각 미인대회별 특징을 분석해 “이 대회는 응모 연령대가 특히 낮은 편”, “1차 심사 합격자 규모는 대략 ○○명” 등 정보를 알려준다. 또 예상 질문을 뽑아 면접을 대비하게 한다. 전국 미인대회 수상자를 몇 명 배출했다고 홍보하는 서울의 ㄱ학원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곧 개최될 ○○대회 준비를 위해 1대1로 5회 코칭하는 데 48만원”이라고 안내했다.

<미인대회 완전정복>(2019·북크크)을 낸 저자 김민설씨는 “미인대회는 요즘 같은 봄과 여름철이 성수기인데 아나운서, 쇼호스트, 배우, 승무원 등을 꿈꾸는 여성의 필수 코스로 여겨진다. 소위 ‘스펙’이라 불리는 다양한 요소 중 미인대회도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 상품화 논란에도 미인대회가 여전히 건재하는 이유는 학원계, 뷰티업계 등이 일종의 ‘미인대회 준비 산업군’을 이뤄 수십년간 경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탓이다.

강혜숙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수십년간 이어진 거센 반대운동에도 미인대회가 계속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는 지역 언론사 등 지자체의 여러 기업, 기관들과 이권이 엮여 있고, 국가의 판단 등 이를 제한할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제라도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기구가 나서서 근본적으로 미인대회를 없애기 위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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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말고 시민 다함께”

변화의 씨앗은 결국 시민들에게서 나왔다. 지난 4월 서울 종로구는 ‘단종비 정순왕후 선발대회’를 기획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취소했다. 선발된 여성에게 추모 문화제 어가행렬시 정순왕후 역할을 맡긴다는 계획이었는데, 시민사회가 “조선시대 정절을 지킨 왕후를 기리자며 만 15~20살 여성(중3 가능)을 대상으로 세 번의 간택 심사를 하는 대회는 문제가 있다”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지역축제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거리로 나간 시민들도 있다. 서울 중랑구 종이접기 모임 회원들과 중랑녹색당 당원들은 올초 친목모임을 하다 매년 5월 중랑구에서 열리는 ‘서울장미축제’에 문제가 많다는 데 공감했다. ‘장미 아가씨’를 주요 캐릭터로 내세워 포스터를 만들고, 축제 기간에 ‘장미 아가씨’처럼 드레스를 입고 화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부스를 운영한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들은 ‘그린로즈’팀(14명)을 결성해 지난 5월24일 열린 서울장미축제 거리 행진에 참가했다. 초록색 종이로 직접 만든 대형 장미를 들고 ‘아가씨 소리 좀 집어치워라’, ‘아가씨 말고 시민 다함께’ 같은 문구로 어깨띠를 둘렀다. 상현 중랑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축제가 구민들에게 미인이 되라고 부추길 게 아니라 시민 누구나 축제의 주인공이 되어서 함께 즐기자고 해야 한다”며 “초록색 장미를 들고 행진하자 시민들이 박수치고 촬영하며 응원해줬다. 다함께 참여하는 축제를 만드는 것도 결국 시민의 힘”이라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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