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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일사일언] "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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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주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저자


아빠는 자주, 인생을 백 미터 달리기에 비유한다. "기본 재산이 있는 놈은 남들보다 오십 미터 앞에서 출발하는 거여. 여기서 기본 재산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돈, 즉 유산이여 유산." 이어지는 말은 이러하다. 모두가 어려웠던 옛날에는 개천에서 종종 용이 났다고,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라고, 제아무리 기를 쓰고 뛰어봤자 한참이나 앞서 출발한 사람을 이길 순 없는 거라고, 그러니 있는 집안 남자와 결혼해 편히 살라고, 고생하지 말라고.

나는 아빠의 말에 깊은 거부감을 느꼈지만 세뇌 교육의 힘은 무섭도록 강력했다. 한 몸과도 같은 친구가, 상속받을 유산은 전혀 없으나 타고난 유머만은 철철 넘치는 남자와의 결혼을 선언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안 되는데! 그러면 우리 아빠가 고생한다고 그랬는데!' 하지만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두 사람은 작은 전셋집을 구해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살림을 꾸려 나갔다.

문제는 전세 계약이 끝나갈 무렵 찾아왔다. 터무니없이 오른 전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만 했다. 나는 부동산과 은행을 번갈아 드나들며 숫자와 씨름하는 친구 부부에게 힘을 보태려 그들과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 친구는 해가 잘 드는 집을 원했다. 그러나 부동산에서는 어두운 집만 보여줬다. 그 정도 예산으로 밝은 집을 구하려는 건 욕심이라면서.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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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려는데 비가 쏟아졌다. 친구의 눈에서도 비를 따라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본 남편이 우산을 펼치며 호탕하게 말했다. "야, 타!" 압구정 '야타족' 흉내를 내는 남편의 모습에 친구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두 사람이 우산을 타고 빗속으로 스며들었다. 좁은 우산 아래에서 몸을 꼭 붙이고 발 맞춰 걸어가는 뒷모습이 마치 이인삼각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인생을 꼭 달리면서 살아야 하나? 저들처럼 천천히 걸어도 괜찮지 않은가?

[이주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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