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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노숙인의 인문학 선생님… "소외된 이웃 섬기는 게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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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훈]

美學 책 3권 동시에 펴낸 철학자

철학자 김동훈(56) 박사는 열세 살 때부터 서울 월계동 판잣집에서 살았다. 7남매 가운데 여섯째인 그는 온 가족이 단칸 셋방에서 함께 살았다고 했다. 쓰레기 매립지가 가까웠기 때문인지 동네에서는 언제나 까마귀가 깍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씨는 "어릴 적부터 삶과 죽음, 존재의 이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지만, 정작 고시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신학과 인문학 책만 파고들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마친 뒤 다시 서울대 미학과 학부 과정에 들어갔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고 1994년 독일 브레멘대로 유학을 떠났다. "집세 빼면 한 달에 20만~30만원씩 쓰면서 공부했다"고 했다. 생활비는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司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벌었다. 10년 뒤 하이데거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인문학은 내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근원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3년째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학교에서 가르치는 철학자 김동훈씨는 "어릴 적 도스토옙스키의 소설과 기형도·서정주의 시를 좋아해서 오랫동안 습작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미학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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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번역한 미학(美學) 책 3권이 최근 국내 출간됐다. 미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독일 학자로 유명한 바움가르텐(1714~1762)의 '미학', 영국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1711~1776)의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비극에 대하여 외'(이상 마티 출판사)다. 모두 서양 근대 미학이 정립됐던 18세기에 나온 경전(經典) 같은 책들이다. 버크의 책은 13년 만의 개정판이고, 다른 두 책은 국내 첫 번역이다. 김씨는 "서로 다른 학문적 영역에서 흩어져 논의됐던 예술과 아름다움을 미학이라는 학문으로 묶어낸 것이 18세기"라면서 "오늘날 서양 미학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원류(源流)로 거슬러 올라가서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07년부터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학교인 성프란시스대학에서 13년째 예술사를 가르치고 있다. "집도 절도 잃고, 박스 칸에서 멸시와 환대의 눈초리에 시달리며, 술에 취해 몸이 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강만큼 절실한 건 자존감 회복"이라고 했다. 4개월의 학기 가운데 첫 한 달은 서양 미술사를 강의한다. 하지만 나머지 석 달은 반 고흐의 '자화상'이나 서정주·윤동주의 시 '자화상' 같은 그림과 문학을 보고 읽으면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열리는 인문학 수업인 셈이다.

알코올중독으로 이혼했던 노숙인이 이 학교에서 공부한 뒤 지금은 알코올 치료 상담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됐다. 서울역에서 동료 노숙인을 돕는 사회복지사로 재취업한 경우도 있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한 분들이 들려주시는 말씀들이기에 그만큼 영혼의 울림도 크다"면서 "살면서 제가 가장 많이 배우는 수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취업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인문학 무용론(無用論)'까지 나오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는 "과학 기술과 공학은 인간에게 편리와 안락함을 주지만, 만족감과 행복을 선사하는 건 어디까지나 인문학의 영역"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미학 고전들을 번역할 계획이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것과 인문학 공부는 내게 언제나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고 했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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