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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애를 낳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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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아이를 더 낳자고, 더 낳으면 혜택을 주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별무소득이다. 왜 그럴까? 본질은 외면하고 출산만 떠들어대니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도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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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감소가 심각한 국가적 문제다. 유엔 전망에 따르면 한국은 2100년에 3,870만 명으로 인구가 크게 줄 것이다. 더 비극적 전망에 따르면 2,476만 명이 될 거라는 예측도 있다. 말 그대로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구 문제는 롤러코스트였다. 인구과잉이 재앙이 될 거라며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폈다. 무리한 측면이 강했지만 국민들은 국가의 정책을 따랐다. 맬서스 인구론의 ‘오류적’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강력한 욕망도 한 몫 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정책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며 하나만 낳자는 목표로까지 빠르게 변모했다. 하나만 ‘제대로’ 낳으면 된다는 생각이 각인되었다. 그동안 많이 낳은 ‘노동자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심각성을 깨달은 건 1990년대 접어들면서다. 갑자기 출산장려정책으로 전환했다. 2000년대 들어서 정부는 ‘저출산ㆍ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다. 2005년의 일이었다. 다음해에는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이 수립되었고 80조 원의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출산율 저하는 막을 수 없었다. 위기는 마침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이를 더 낳자고, 더 낳으면 혜택을 주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별무소득이다. 왜 그럴까? 그럴 수밖에 없다. 본질은 외면하고 출산만 떠들어댄다.

나는 이 칼럼이 많은 비난과 논란을 부를 걸 안다. 내용의 문제보다 논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한다. 본질을 외면하면서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이 낳으라고? 누굴 위해서? 더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 누군가의 지갑이나 금고를 채워줄 소비자가 필요해? 나라를 지켜줄 병사들이 필요해? 도대체 왜?

산아제한 캠페인 덕도 있지만 인구감소의 가장 결정적 전환점은 바로 ‘1997년 체제’였다. 직장에 충성하면 그래도 한 가정 꾸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게으름이나 낭비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흐름은 외면한 채 계속 잘 나가던 것만 믿고 경영을 잘 못하고 정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서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흔들렸고 그 몫은 고스란히 노동자 서민에게 돌아갔다. 대량해고의 날벼락이 예사였다. 살아남았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에서 애를 낳는다? 사랑하는 부부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니다. 도대체 아이를 키울 상황이 아닌 거다. 그 불안정한 상황에서 엄청난 육아비와 교육비는 누가 감당하고? 사회와 국가는 책임지지 않는다. 각자도생의 몫이다. 그렇게 부모들은 출산을 포기했다. 삼포세대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낳으라고? 왜?

내가 살아온 세상이 힘들어도 희망이 보이면 버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 자식도 그렇게 살 텐데? 그래도 낳으라고? 비정규직의 고달픈 삶만 강요하면서 그 말이 나오는가? 죽어라 공부해도 살인적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 좋은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 얻어서 공무원처럼 정년 보장된 직업 아니면 앞으로는 대부분 10년의 직장생활만 보장되는 세상이다. 역전의 삶은커녕 당장 호구지책도 막막하다. 그런데 애를 낳으라고? 왜?

출산을 하려면 사랑하고 혼인해야(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한다. 그런데 막막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나 혼자 사는 것도 버겁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살자고? 가난했던 시절 지금의 기성세대는 가진 것 없어도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자고 할 수 있었다. 직장이 있으면 한 가족 부양할 수는 있었으니까. 그거 하나 믿고 청혼했다. 사랑만 먹고 사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데 막상 청혼하지 못하는 청춘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감이 없어서가 아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결혼을 포기했다. 삼포세대의 두 번째 양상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취업은 난망하다. 남은 건 비정규직 일자리뿐이고 심지어 ‘제로 아워’ 계약도 다반사다.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포기한다. 삼포세대의 마지막은 이렇게 연애를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청춘이 사랑을 포기하는 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애를 낳으라고?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내가 그 세대라면 무슨 생각이 들까. 그런데 애를 낳으라고? 과연 아이의 삶은 나보다 더 나을까? 나도 포기할 것 같다. 우리 세대는 운이 좋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았던 셈이다.

이런 상황은 조금도 고치지 않으면서, 걸핏하면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 정규직 전환 운운하냐며 타박하면서 애를 낳으라고? 당신들은 열심히 일해 줄 노동력, 제품을 소비해줄 소비자, 나라를 지켜줄(그 잘난 사람들 자식들은 군대에 보내지 않으면서) 군인이 필요한 것 아닌가? 국회는 이들을 위한 입법도 외면하면서 무슨 애 타령인가. 출산율을 높이려면 그 환경부터 만들고 나서 ‘부탁’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낳기 싫어서 안 낳는 게 아니다!

김경집 인문학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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