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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설마'에 1兆 물렸다, 속터지는 투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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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작년에 가입하신 DLS 상품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해당 상품 평가 수익률이 현재 -61%로 원금 손실이 예상되는데요…."

"무슨 소리예요? 예금이랑 똑같고 금리는 1~2% 더 주니까 만기 때 찾으러 오라더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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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분당구에 사는 이모(78)·권모(75)씨 부부는 최근 주거래 은행 PB(프라이빗뱅커)에게서 귀를 의심케 하는 전화를 받았다. 지난해 총 2억2000만원어치 가입한 금리 연계 DLS(파생결합증권)가 큰 손실을 보고 있으니 은행에 상담받으러 오란 얘기였다. 이 70대 부부는 '예금 금리보다 조금 더 얹어주는 매우 안전한 상품'이라는 PB의 추천만 믿고 노후 자금을 굴릴 요량으로 가입했다가 지금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이씨는 "미국·영국 같은 안전한 나라 국채에 투자하니까 걱정 없다고 하더니, 1억3000만원 넘게 날아갔다. 그나마도 지금 환매하면 환매수수료로 450만원(5%)까지 떼고 준다더라. 미칠 노릇"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세계 경기 침체 공포 속에 각국 장기채 금리가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이와 연동된 파생상품에 투자한 투자자들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우리은행, KEB하나은행과 일부 증권사 등에서 작년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 사이 약 1조원어치 판매한 금리 연계형 DLS가 현재 적게는 -40%, 많게는 -90% 이상 손실률을 기록 중이다. 주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판매했지만, 정부 고용보험기금도 585억원 투자했다가 477억원을 날렸다(수익률 -81%).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만기가 돌아오기 시작하는데, 단기간 내에 채권금리가 급반등할 가능성이 작다는 게 문제다. 투자자들은 '속았다'며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금융 당국은 이번 일이 제2의 키코(KIKO) 사태가 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은행 등이 불완전 판매를 한 게 아닌지 들여다보고 있다. 금감원은 19일 금리 연계 DLS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번 주 중 판매사 현장 조사에 나선다. 금리가 급락하던 3월 이후에도 판매가 계속된 이유가 무엇인지, 이 과정에서 경영진이 어떤 의사결정을 내렸는지 등을 들여다볼 계획이다.

◇DLS 파동…떠오르는 키코 악몽


문제의 DLS는 독일 10년 만기 국채 등 채권 금리가 일정 구간 밑으로만 안 떨어지면 3~5% 수익을 주지만, 그 밑으로 떨어지면 최악의 경우 투자금 전부를 잃을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됐다. '국민 재테크' 상품인 ELS(주가연계증권)나 키코와 닮은꼴이다. ELS는 주가, 키코는 환율의 변동 구간을 정해놓고 주가·환율이 이 안에서만 움직이면 받을 수 있는 수익률 상한선을 정해뒀지만 손실률은 원금의 100%까지 열어둔 '위로는 막혀 있고 아래로는 뚫린' 고(高)위험 파생상품이다. 과거 키코는 환율이 변동 구간을 넘어서면 가입자가 계약금의 최대 2~3배까지 물어줘야 하는 구조였다.

은행들은 작년에도 수조원어치의 금리연계 DLS를 팔았다. 당시엔 금리가 안정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대부분 상품에 만기 때 원금과 약정 수익을 지급할 수 있었다. "손실 난 적 한 번도 없는 안전한 상품이에요"라며 은행에서 고객을 끌어들인 이유다. 그러나 올 들어서 국제 금융시장 상황이 급변하면서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올 초 0.2% 후반대였던 독일 국채 10년물 금리는 3월 하순 마이너스에 진입하기 시작해 7월 중순부터는 가파르게 떨어졌다. 우리은행 판매 상품의 경우 만기 때 금리가 -0.2% 이상이면 연 환산 4.2% 수익을 주지만, -0.2% 미만부터는 손실이 시작돼 -0.7%에 도달하면 원금 전부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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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15일 독일 국채 10년물 금리는 -0.713%로 마(魔)의 전액 손실 구간에 도달했다. 16일엔 금리가 -0.7% 위로 살짝 반등했지만, 당장 다음 달부터 다가오는 만기일에 금리가 -0.2% 위로 급반등해야만 원금 전부를 건질 수 있다. 현재로선 가능성이 희박하다.

10년 전 환율 변동 위험을 피하기 위해 키코에 가입했던 기업들 역시 곧 다가올 금융 위기와 이에 따른 환율 폭등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안전한 상품이라는 말만 믿고 가입했다가 낭패를 봤다. 가입자들은 '사기'라고 주장하며 소송했지만, 2013년 대법원은 '사기는 아니다'라며 은행 손을 들어줬다. 다만 200건이 넘는 개별 소송에서 기업이 불완전 판매를 당한 사실을 인정받아 일부(5~50%)라도 배상받은 경우도 10%가량 된다. 2010년 금감원 조사에선 키코 가입 기업들의 손실 규모가 3조2274억원,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는 피해액이 최소 10조원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위험 몰랐어도 문제, 알았으면 더 문제"

투자자들은 금리 급락 상황을 예견하는 게 어려웠다 하더라도 최소한 금리가 꺾이기 시작한 올해 3~4월 이후에는 판매를 중지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원금을 전부 날리기 직전이 아닌, 원금 손실이 어느 정도 시작됐을 때 바로 알려 남은 돈이라도 건질 수 있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한탄도 한다. 독일 국채 금리가 마이너스 구간에 진입한 4월 이후 가입했던 한 투자자는 "설마 독일이 망하겠느냐. 독일이 망하지만 않으면 원금 잃을 염려가 없다고 걱정 말고 만기 때 찾으러 오라던 PB 설명이 생생하다"면서 "정기예금만 들던 보수적인 투자자인데, 예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했기에 가입했지 원금 전부를 날릴 가능성이 있단 얘기를 강조했다면 가입했을 리 없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PB들은 문제가 불거지자 은행 본점에 몰려가 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선 PB들 사이에서도 대규모 손실 가능성이 제기되기 시작했을 때 손절매(손해를 감수하고 파는 것)를 안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지만, 본사에선 별다른 지침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판매 금융회사들이 위험을 몰랐어도 문제고, 알고서도 팔았으면 더 문제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未상환 ELS·DLS 117조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미상환 DLS 발행 잔액은 40조6188억원, ELS는 76조1685억원으로 합계 117조원에 육박한다. 올 들어 ELS·DLS는 매달 10조원씩 팔려나갔다. 고위험 파생상품의 세계 최대 판매처다. ELS 투자자들도 최근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홍콩 반정부 시위 여파로 홍콩H지수가 연일 급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H지수를 기초 자산으로 한 ELS가 올 상반기 발행된 전체 ELS의 3분의 2에 달한다. H지수는 4월 고점 대비 현재 15.8% 하락한 상태로, 지금보다 주가가 23%가량 더 떨어지면 원금 손실 구간에 도달하게 된다. 박천웅 이스트스프링자산운용 대표는 "은퇴자나 은퇴를 앞둔 사람들에게 전 세계에 아무 일이 없기를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이런 상품을 많이 파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객 손실은 PB 성과에 반영 거의 안해… 이러니 팔고 나면 끝]

문제의 금리연계형 DLS는 우리은행과 KEB하나은행 두 곳에서만 8000억원가량 팔았다. 증권사 등에서 판 물량은 2000억원 정도다. 판매 물량의 80%가량을 두 은행에서 판 것이다. "정기예금 만기 돼서 연장하러 갔다가 권유받았다" "설마 은행에서 원금을 다 날리는 상품을 팔았을까 상상도 못했다. 내가 안전 위주 투자자라는 걸 아는 10년 단골 PB가 설마?"라고 항의하는 투자자가 많은 이유다.

금융업계에선 고객 수익률이 PB 실적에 고작 2~5%만 반영되는 이 은행들의 성과 평가 구조가 이번 사태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은행들은 KPI(Key Performance Indicator·핵심성과지표)로 직원 성과를 평가해 인사고과에 반영하는데, 일선 지점 PB들의 KPI 구성 항목 중 고객 수익률은 하나은행이 5%, 우리은행의 경우 2%에 불과하다.

시중은행 중 최저 수준이다. 나머지 KPI 구성 항목은 신규 상품을 얼마나 팔았는지, 지점 손익에 얼마나 공헌했는지 등이 차지한다. 상품 가입 권유를 하고 나면 그뿐, 애초 고객이 실제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는 나 몰라라 해도 상관없는 구조여서 상품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비(非)이자이익을 늘리려고 판매수수료 따먹기에 혈안이 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DLS의 경우 선취 판매수수료가 1~1.5% 수준이다.

이번처럼 최소 1억원짜리를 팔면 은행은 일단 100만~150만원을 가져간다. 만기를 4~6개월로 짧게 잡은 상품을 판 것도 만기가 도래한 고객에게 재예치를 권해 수수료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는 지적이다.

☞DLS (파생결합증권 Derivative Linked Securities)

주식을 제외한 기초자산, 즉 금리, 환율, 원자재(금·은·원유), 신용위험 등의 투자자산이 특정 기간에 정해진 구간을 벗어나지 않을 경우 약정 수익률을 지급하고, 구간을 벗어나면 원금도 손실을 보게 되는 구조의 금융상품. 최근 독일과 미국, 영국 등 선진국 국채금리를 기초자산으로 한 DLS가 전체 발행 물량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ELS(주가연계증권 Equity Linked Securities)

특정 주식의 가격이나 주가지수가 일정 기간에 정해 놓은 범위에 있으면 약정 수익을 지급하는 파생 금융 상품. 홍콩H지수 등 2~3개의 주가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지수형 ELS'가 요즘 대세다. 통상 이 지수들이 투자 기간에 40~60%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4~8%씩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이상 떨어지면 원금을 잃을 수 있다.

김은정 기자(ej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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