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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공산주의자, 주체사상가 황장엽은 애국자로 추앙”…김원봉 서훈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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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조선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1898~1958).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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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산은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대부분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뚜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했으며 톨스토이의 글도 모조리 읽었다. 그는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들은 모두 그를 멀리서 동경하였다. 그가 대단한 미남이었고 로맨틱한 용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즈가 1920년 상하이에서 지켜 본 김원봉의 모습)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자 조선의열단이 창단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은 지난 6월6일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그의 공적을 언급하면서 정쟁의 한복판으로 소환되더니, 지난 15일에는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다시 뉴스가 됐다.

일제강점기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가장 많은 현상금이 붙은, ‘현장 사살’ 명령까지 내려진 인물로 잘 알려졌다. 반면 보수 진영에선 “6·25의 원흉”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 등 월북 이후 행적을 두고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김원봉을 둘러싼 논쟁은 한국의 이념지형을 축소한 상징 투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실제 김원봉이라는 인물과 그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있을까.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20일 김원봉의 항일독립혁명을 학술적으로 살펴보는 ‘조선의열단과 약산 김원봉, 100년을 기억하다’ 학술회의를 국회에서 개최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약산 김원봉 서훈 무엇이 문제인가’ 발표문에서 해방 이후 정국으로부터 1958년즈음 북한 공직에서 ‘퇴장’할 때까지 그의 행적을 짚어본다. 그가 월북했던 까닭과 실제 북한에서 영향력에 대해 살펴보려는 시도다.

김원봉이 친일 경찰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은 뒤 신변에 위협을 느껴 월북을 결행한 사실은 알려져 있다. 김 전 관장은 김원봉의 월북이 당시 상황 속에서 복합적 동기로 이뤄졌을 것으로 평가한다. 여운형의 암살 이후 거듭되는 테러 위협에 불안을 느끼고, 미 군정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정책이 확고해지면서 중도·좌파세력 입지가 좁아지자 예전 동지들인 조선의용대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북한을 택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원봉 주변 인물들도 비슷한 증언들을 보탠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황용주 전 MBC 사장은 “약산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또 그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면서 “이같은 성향의 약산이 북행한 것은 민전(민족주의민주전선)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어려운 국내 정황 속에서 취할 수 있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원봉의 비서나 의열단 출신 인물들도 신변 위협을 월북 동기로 주로 꼽았으나, 좌익 최고위급 간부로서 민전의 노선에 따라 북한에 남게 됐다는 지적도 있다.

월북 동기만큼이나 북한에서의 ‘퇴장’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확인된 사실은 없다. 김일성 유일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남한 출신 인사들과 함께 숙청됐다거나 은퇴 혹은 자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논란은 그의 월북 이후 행적이다. 김 전 관장은 “김원봉이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로동상, 무임소상,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나 모두 권력 실세와는 거리가 먼 위치”였고 “끝까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고 지적했다. 최근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이 발굴한 평양 주재 소련 대사의 ‘푸자노프 일지’에는 김원봉이 체포 직전 남쪽으로 도주하기 위해 애쓴 것으로도 적혀 있다. 그는 이후 북한 사회의 공식문서나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납북·월북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평양 양미리 애국열사능에도 묻히지 못했다.

김 전 관장은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6·25의 원흉’으로 몰아치는 주장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며 “당시 당이나 군, 정부의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이었다”고 밝힌다. “‘전쟁시 국군을 많이 죽여 훈장을 받았다’는 주장 역시 허구에 불과하다”면서 “‘국가훈장 1급 최고훈장’이 아닌 평북 지역의 보리 파종 실적이 우수하다고 받은 ‘로력훈장’”이라고 전한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서는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도록 하고 있다. 김 전 관장은 “북한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이자 핵심적 권력층이었던 황장엽은 독립운동은 커녕 그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음에도 2010년 이명박 정부에서 1등급 훈장인 무궁화장까지 추서하고,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며 “독립전쟁의 영웅 김원봉은 용납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이고, 주체사상가 황장엽은 애국자로 추앙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건전한가”라고 되묻는다.

윤경로 전 한성대총장은 기조강연을 통해 ‘조선의열단의 창단과 김원봉의 항일투쟁’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윤 전 총장은 “1920~1930년대 무장독립운동사에서 약산 김원봉의 위상과 무게가 대단한데도 개인에 대한 평가는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서 “남에서도, 북에서도 ‘버림받은’ 김원봉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소개한다.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중국인의 눈으로 본 조선의열단과 김원봉’이라는 발표를 통해 당시 중국에서 발행된 항일신문 ‘구망일보’에 언급된 조선의용대 위상과 활동을 전한다. 1938년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는 무장투쟁만이 아니라 대민 선전과 국제 연대를 추구하며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유지를 이어갔다. 김 교수는 “조선의용대는 대민 활동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의 현황과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하고, 일본인 포로를 위한 행사를 통해 반제국주의 연대를 명확하게 드러내기도 했다”며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반인류적 행위를 자행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자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위한 한·중연합의 정수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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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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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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