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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취재파일] 친일 화가 표준영정 기사를 쓰고 老 화백에게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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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이듬해인 1973년 4월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충무공의 진영을 통일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다. 전통문화 개발을 통해 문예중흥을 이룩하기 위한 '5개년 계획'의 일환이었다. '표준영정' 제도가 그렇게 탄생했다.

곧 선현의 영정에 대한 공통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에서 '영정동상심의위원회'가 구성됐다. 같은 선현에 대해 제각기 다른 용모나 이미지가 아닌 공통된 일종의 규격을 마련함으로써 일관된 역사의식을 뿌리내리기 위한 취지에서다. 이른바 '선현 도량형 통일' 작업이 이뤄진 것이다.

제1호 표준영정이 그래서 충무공 영정이다. 그런데 이 표준영정을 그린 작가가, 지금껏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고 있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다. 표준영정 제도가 탄생한 이래 친일 화백 논란은 오래 거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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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조정식 의원실에 따르면 문체부가 지정한 99인의 선현 표준영정 가운데 14점이 논란의 대상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3인이 그린 그림들이다.

● 일본칼 찬 이순신 동상 바꿨더니…얼굴이 문제

장우성 화백은 이순신(지정연도 '73), 윤봉길('78), 정몽주('81), 강감찬('74), 김유신('77) 표준영정을 그렸고 김기창 화백은 세종대왕('73), 을지문덕('75), 조헌('77), 김정호('77), 무열왕('77), 문무왕('77)을 그렸다. 또 한 명의 친일 화백으로 거론되는 김은호 화백은 신사임당('86)과 율곡 이이('75)의 표준영정을 그렸다.

장우성, 김기창 화백은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 관계사료집>에도 등장한다. 월전 장우성 화백의 충무공 표준영정(제1호 국가표준영정)은 국회의사당 본관에 있는 이순신 동상의 용모에도 쓰였다. 지난 2008년 '왜색' 논란으로 미흡한 고증을 지적받고 5억 5천만 원을 들여 2015년 다시 건립한 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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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를 찬 이순신으로 논란이 돼 다시 건립한 동상인데도 여전히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 화백이 그린 얼굴을 하고 있다. 수년 간 올바른 역사 고증을 위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 본부 혜문 스님은 동상 용모의 기초가 된 표준영정 속 이순신 장군 가슴에 달린 흉배나 충무공 용모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기록 등이 제대로 고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문화재제자리찾기'와 충무공 15대손은 최근 문화재청에 표준영정을 다시 지정해달라고 청원했다.

● 표준영정 논란…화폐까지 불똥

동상뿐 아니다. 일상 속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위인들의 영정은 화폐다. 대한민국 중앙은행인 한국은행도 관례적으로 발행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 도안을 이 심의위가 정한 '표준영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종대왕, 이순신, 신사임당, 율곡 이이. 공교롭게도 주화나 지폐 도안으로 쓰이고 있는 대부분 선현들의 표준영정 작가가 모두 친일화백이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 (퇴계 이황의 표준영정은 현초 이유태 화백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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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식 의원실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현황 자료에 따르면 멀게는 1972년 5천원권부터 최근 발행된 2009년 5만원권까지 '표준영정을 기초로' 제작된 것으로 나와 있다. '표준영정 사용정도' 항목엔 율곡 이이와 세종대왕은 모두 "정면화인 표준영정을 기초로 측면화인 화폐용 영정을 제작"했다고도 명시돼 있다. 2009년 오만원권 영정은 "표준영정을 기초로 옷차림, 두발 모양을 변형하여 제작"했다고 명시했다.

2014년 위인 후손과 시민단체 등 장외에서 거듭 지적되었던 이 문제가 국회에서도 언급됐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는 명분이 되는 훈령이 마뜩잖다는 이유로 재심의 권고를 거부했다.

친일화백 작품을 표준영정에서 제외하는 법안이 심사된 2015년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선 여야 의원 간 표준영정 재심의를 둘러싼 설전이 벌어졌다.

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에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하는 문제"라 주장했고 여당(당시 새누리당)에선 표준영정 재지정시 통용되고 있는 화폐를 모두 수거하고 새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찮다는 의견이 나왔다.

친일화백 표준영정 문제가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동안 문제는 되풀이됐다. 특히 SBS 취재 결과 한국은행은 2009년 5만원권 발행에 앞서 2004년, 화폐에 쓰기로 한 '신사임당' 표준영정을 그린 김은호 화백 후손들과 이용료 지급 계약을 맺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저작권 협의는 따로 남겨진 내역이 없고, 이용료 명목으로 천이백만 원을 지급한 기록을 확인했다"고 취재진에 밝혔다. 그러면서 "김 화백이 그린 그림이 정부에서 지정한 표준영정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절차였다"고 설명했다.

● 이종상 화백, "내 그림 '표준영정'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기사가 출고되자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기존에 '표준영정을 기초해 옷차림, 두발 모양을 변형하여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5만원권 신사임당 도안 작가이자 5천원권 율곡 이이 도안 작가 이종상 화백 측의 항의가 들어왔다.

2009년 발행된 5만원권의 신사임당 도안은 일랑 이종상 화백(1938년~)이 그렸다. 이 화백은 김은호 화백의 제자다.(김 화백의 일부 후손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통용되는 5천원도 이 화백 작품이다. 이 화백은 지난 6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몸이 편찮으신 이당 김은호 선생의 추천으로 5천원권을 그리게 됐다"고 밝혔다. 두 영정 모두 표준영정과 같은 '정면'이 아닌 살짝 인물의 얼굴을 틀어서 그린 측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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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과 2시간 반에 걸쳐 이뤄진 전화 통화에서 이 화백은 당시 도안을 그릴 때 "김은호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영정을 조금도 참고하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강원 강릉의 오죽헌에 보관하고 있는 김 화백의 신사임당 영정은 대단히 고증이 잘못된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관례상 한국은행 화폐 도안 역시 표준영정을 기초로 하는 것 아니냐는 질의엔 "적은 수고비로 의뢰받은 작품이고, 어떤 심의도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표준영정과는 명백히 다른 독립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화백은 영정동상심의위원 출신이다.

이 화백 측은 "1977년 당시 국민적으로 크게 관심 없던 독도를 최초로 풍경화를 그려 문화적인 독도 영유권을 확립한 최초의 화가"며 "1997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에 초청되었을 때도 박물관 지하에서 발견된 성벽에 병인양요를 주제로 한 작품을 설치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또 이 화백 측은 "이런 공을 인정받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며 '친일 논란'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고증이 왜곡된 표준영정 재심의 필요성을 거듭 요구했다고도 밝혔다.

오천원권 도안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이종상 화백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표준영정 요청을 받고 나서 율곡 이이 영정을 그린 게 아니고 그 이전에 그린 것이며, 스스로 지난한 고증 끝에 스승이 그린 영정에 많은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오천원권 화폐 도안을 그렸을 때에는 심지어 김은호 선생 생전이었는데 선생이 보여 달라고 할 때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보여주지 않았다. 표준영정과 내가 화폐에 그린 도안을 비교해보라. 완전히 다르다."

● "기법 전수를 위해서라면 친일파 아니라 더 한 범죄자여도 찾아갔을 것"

김은호 화백에게 사사 받았다는 인터뷰가 문제가 돼 '제자 사칭'을 주장하는 김 화백 후손과 송사에까지 휘말렸다.

"김은호 화백이 순종 어진을 그린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이었다. 동양화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뒤 그림 뒷면에 점을 찍어 어진을 채색하는 점묘법을 전수받기 위해 찾아간 것일 뿐이다. 나중에 친일파라는 걸 알게 돼 주변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법을 전수받기 위해서라면 친일파가 아니라 더 한 범죄자라도 찾아가서 전수받았을 것이다. 내가 배웠기 때문에 지금 이 기법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올해 여든이 넘은 이종상 화백은 기자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내내 말을 이어갔다. 이 화백은 심지어 율곡 이이 후손인 덕수 이 씨 종가에서까지 새 영정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밝혔다.

"후손들이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강릉 시장이 화료를 지불할 테니 그려달라는 이야기까지 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제대로 고증된 전신상을 그리고 표준영정으로 지정받아야 눈을 감겠다. 적어도 내가 그려야 김은호 선생 작품을 1%라도 연민의 정을 가지고 이어갈 수 있지 않겠나. 그러나 스스로가 영정심의위 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주장을 강하게 되풀이하지 못했다."

● '선현 영정의 도량형 통일'…표준영정 무용론도

취재 중 조정식 의원실을 통해 한국은행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표준영정의 변경으로 인해 현행 지폐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에 대한 비용 추계"는 약 4,700억 원. 한국은행 측은 "신규 은행권 제조 비용은 현재 유통되는 은행권의 규모 등을 감안"해 해당 액수를 추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종상 화백의 말대로 화폐 도안으로 지정된 작품 두 점이 '표준영정'과 전혀 관련 없는 독립된 작품이라면 표준영정을 교체한다고 해서 오만원권, 오천원권 화폐를 수거할 필요는 없다. 오천원, 오만원권을 포함한 전체 화폐 도안이 표준영정에 기초한 것이라는 원래 8뉴스 리포트는 이 화백의 지적을 정중히 반영해 수정을 거치는 중이다.

분명한 건 문화 예술계 친일 인사들의 행적에 관한 논란이 매듭지어지지 않는 동안 발생한 국가적 비용이다. 국가 기관으로서 '선현 영정 도량형'을 따라야 하는 한국은행은 표준영정에 기초한 화폐 도안을 제작했다고, 정작 도안을 그린 화백은 표준영정을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고 엇갈린 해석과 주장을 내놓는 사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친일 행적이 기록된 화백 후손들에게는 천 이백만 원의 이용료가 지급되었다.

문체부는 표준영정을 활용한 저작물과 저작권료에 대한 현황을 일괄 관리하고 있지 않다. 한국은행을 제외한 다른 중앙기관과 지자체 등에서도 저작권료가 계속 지급되었을 공산이 크다.(저작권법에 의거해 원작자 사후 70년까지 권리가 유효하다.)

2013년부터 표준영정 재심의를 위한 법률 개정안이 속속 발의된 가운데 지난해에도 표준영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문제가 있는 경우 지정 해제할 수 있는 문화예술진흥법 일부법률개정안(더불어민주당 김해영 의원 대표발의)이 발의된 뒤 소관위에 계류돼 있다.

일각에서는 인물을 통해 기억을 공유하는 데 국가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표준영정 제도'의 무용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조은정(2014)은 「표준영정에 대한 연구 – 공동체 의식과 감정통합의 균일화 과정」에서 "국민통합의 기제로서 선택한 표준영정은 인물에 대한 해석을 소수가 독점하고 국가가 공인함으로써 다수에 의한 다양한 해석을 막는다"며 "순혈주의를 버린 21세기에 혈통을 기반으로 하는 표준영정을 사회 통합의 이미지로 채택한 방안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표준영정을 둘러싼 논란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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