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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초범이라고… 반성한다고… 창살 비집고 나온 ‘인면수심’ [탐사기획-'은별이 사건' 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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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강간’ 판례 분석해보니 / 2017∼2019년 선고 1심 판결 49건 중 / 실형선고까지 이어진 경우 43% 불과 / 봉사활동 실적·장기 기증자 등록 등 / 범행과 무관한 이력이 면죄부 작용도 / 13세 미만 인지 여부 판결에 큰 영향 / 피해 아동에 ‘피해자다움’ 잣대 적용 / 외모부터 옷차림까지 중요 판단 근거 / 전문가 “외형 등 따지는 건 시대착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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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삼촌 옆에 누워 봐.’

2년 전 덜미가 잡힌 A씨의 범행 수법은 ‘친근함’이었다. A씨는 수년간 친구의 어린 딸들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했다. 친구 집을 자주 찾은 A씨는 피해 아동들과 오랜 시간 얼굴을 익혔다. 아이들은 A씨를 ‘삼촌’으로 부르며 따랐다. 이 점을 악용해 A씨는 아이들한테 전화를 걸어 집 근처로 오게 한 뒤 데려가 성폭행했다. 자매의 나이는 불과 10세와 12세. 지적장애까지 있어 일반 아이보다 유인하기도 쉬웠다. 법원은 A씨에게 징역 8년에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10년 부착을 선고했다.

‘인면수심’, ‘천인공노’…. 아동 대상 성범죄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다. 비뚤어진 성적 욕망을 위해 신체적·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동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형법은 13세 미만 아동과의 성관계는 사실상 ‘무조건’ 처벌하는 의제강간 연령 조항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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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법은 정말로 엄격하게 집행되고 있을까. 20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이명숙 전 한국여성변호사회장 등 아동·청소년 성범죄를 주로 다뤄온 변호사 5명의 도움을 받아 2017∼2019년 전국 법원이 선고한 미성년자 의제강간죄 1심 판결 49건을 분석해보니 실형 선고까지 이어진 경우는 10건 중 4건(42.9%)에 불과했다. 재판부가 은연중 피해자의 외양이나 품행을 지적하며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강조한 경우도 있었다. 분석에 참여한 변호사들은 “사건별로 특성이 다르긴 하지만, 미성년자 보호라는 입법 취지에서 벗어난 판결이 일부 있다”고 지적했다.

◆‘가족이 선처를 호소’, ‘장기기증 약속’… 절반 이상 ‘집행유예’

분석 대상인 미성년자 의제강간 사건 1심 판결 49건 중 무죄가 선고된 경우(1건)와 소년부로 송치된 경우(1건)를 빼면 모두 유죄(94.4%)가 선고되긴 했다. 실형은 41.3%, 집행유예가 53.1%였다. 집행유예와 함께 대부분 40∼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95.7%)과 함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등 취업 제한(27.7%), 사회봉사 명령(17.0%) 등을 받았다.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자의 절반 이상한테 ‘처벌’ 대신 ‘교화’의 기회를 준 셈이다. 법원은 그 이유로 ‘초범’, ‘진지한 반성’,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일부 판단에 대해 전문가들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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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교회 전도사 성폭력 사건’(창원지법)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지도하던 초등부 신도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전도사 B씨는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과자를 주겠다”며 피해자를 유인한 뒤 억지로 자기 무릎에 앉혀 입을 맞추거나 손목을 묶고 성폭행한 혐의였다. 하지만 법원은 “B씨가 상당한 금액을 들인 합의를 통해 피해 회복에 애썼고, 피해자 부모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실형 선고를 피했다. “B씨의 어머니와 친지, 주변 사람들이 선처를 원하는 등 사회적 유대관계가 분명하다”고도 했다.

이명숙 변호사는 “이런 판단은 성범죄자 교화에 주변인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참작한 것인데,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도 범행을 저지른 것 아니냐”며 “이런 이유로 교화 가능성을 따진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항소심에선 1심이 깨지고 징역 2년 실형이 선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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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범 가능성이 크다는 걸 인정하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결도 있다. 지난해 대구지법 김천지원은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10세 여자 초등학생을 야산으로 끌고 가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C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C씨가 성적 충동 조절 능력이 부족해 재범 위험성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그러면서도 “피해자 아버지에게 합의금을 전달하고, 앞으로 정신과 치료도 받겠다고 다짐했다”며 실형을 면해줬다.

범행과 전혀 상관없는 피고인의 이력이 ‘면죄부’로 작용한 경우도 있다. 2017년 스마트폰 랜덤채팅 앱으로 만난 11세 여아를 강제추행한 D씨는 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선고를 받았다. 감형 요인은 뜻밖에도 “피고인이 대학 시절부터 각종 봉사활동과 장기·골수 기증 희망자 등록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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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세계일보 취재팀과 함께 미성년자 의제강간에 관한 1심 판결문 분석에 참여한 변호사들이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법무법인 나우리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혜겸·이명숙·곽소현·장경아·최수영 변호사. 하상윤 기자


◆아동 피해자도 피해 갈 수 없는 ‘피해자다움’

미성년자 의제강간죄로 처벌되려면 피해 아동이 13세 미만임을 상대방이 알고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이 때문에 변론도 ‘피해자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데에 맞춰지곤 한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나이를 짐작하고 있었는지 따지기 위해 양측 진술은 물론 여러 증거를 종합해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과정에서 아동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E씨는 12세 여자 초등학생을 강간한 혐의로 서울중앙지법 재판을 받았다. E씨는 법정에서 “피해자가 13세 미만인지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피해자가 나이를 적극적으로 속였다고 보기 힘들다”며 “피고인을 만날 당시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민낯에 모자가 달린 티셔츠를 입은 수수한 차림이었고, 외모가 또래들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편이 아니었다”고 판시했다. 피해 아동의 ‘외모’를 판단의 주된 근거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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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2017년 수원지법은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신체 등을 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주장을 배척하며 생뚱맞게도 피해자의 키와 몸무게를 거론했다. 재판부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피해자의 키는 약 148㎝, 몸무게는 50㎏ 정도로 또래에 비해 특별히 체구가 크거나 외모가 성숙한 편은 아니었다”고 판결문에 썼다.

전문가들은 법정에서 ‘앳된 외모’, ‘화장하거나 치장하지 않은 모습’ 등 피해 아동의 외형과 품행을 따지는 건 시대착오적이란 입장이다. 이명숙 변호사는 “요즘은 나이에 비해 신체발육이 빠르고 초등학생도 화장하고 성인처럼 옷을 입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라며 “피해자는 피해자인 것이지 외모의 성숙도나 품행 등은 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법원이 아동의 특성은 도외시한 채 아동한테도 성범죄 피해자다운 모습을 요구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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