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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삶은 소대×리' '노죽 연극쟁이'… 北 선전문 전문가, 정찰총국에만 100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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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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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하늘을 보고 크게 웃음)할 노릇" "설태 낀 혓바닥"…. 북한의 잇따른 막말 공세가 화제다. 원색적이다 못해 어쩌면 이런 기발한 표현까지 만들어내느냐는 우스개까지 나온다. 지인들이 북한에선 일상용어인지 묻는다. 대답은 "노(No)". 일상 대화에선 이렇게 거친 표현은 잘 안 쓴다.

다만 말투 자체가 남한보다는 거친 편이다. 북한식 거친 말투 때문에 남한에 와서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탈북민도 적지 않다. 처음에 한국에 오니 말투가 너무 여성적이었다. 견해를 물어보면 '~것 같아요' '라고 생각합니다' 하면서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것도 눈에 띄었다. 뉴스 앵커는 또 어찌나 말이 느린지. 속도에 익숙해지는 데 한참 걸렸다.

북한에서도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언어 예절 교육을 한다. 웃어른과 직장 상사에게는 반드시 존칭어를 쓴다. 안면이 없는 사람과 전화로 대화할 때도 존대를 한다. 소꿉친구에겐 이름을 부르지만 직장 동료에겐 '동무', 직장 상사에게는 '동지'라는 존칭을 쓴다.

이런 언어 예절과는 무관하게 북한 외무성과 대남 기관, 노동신문 등이 한국이나 미국을 향해 비난 수위를 올릴 때는 '언어 테러' 수준의 과격한 단어를 골라 쓴다. 북한의 독특한 정치 구조와 관계가 있다. 북한 정권은 한국, 미국, 일본 등 적대 세력을 향한 극도의 증오심과 외부 위협을 계속 만들어 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체제다. 그래서 유치원 때부터 증오심과 투쟁심을 심어주기 위해 '미국 승냥이' '일본 쪽발이' '남조선 괴뢰' '남조선 삽살개' '지주 놈' '자본가 놈' 등 무자비한 표현을 가르친다. 적대 인물을 묘사할 때도 눈은 '눈깔'로, 머리는 '대갈통'으로, 행동은 '지랄발광'으로 표현한다. 이런 거친 표현에 길들여져서 북한 사람들은 언론의 과격한 언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엔 막무가내로 내뱉은 말 같지만 북한 당국은 대외적으로 보내는 표현 선택에 엄청나게 품을 들인다. 일부 한국 언론에서 대미 성명이나 대남 선언은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검열한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미 성명이나 대남 선언은 선전선동부의 사전 검열을 거치지 않고 김정은에게 직접 결재를 받아 언론에 보낸다. 선전선동부에서는 외무성이나 대남 라인에서 어떤 방향을 취할지 모른다. 외무성 국장 발언은 외무성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메시지는 통일전선부(통전부)가 작성한다. 선전선동부는 내부 선전용만 관리한다.

외무성의 경우 위에서 "미국, 한국 한번 답새기라('답새기다'는 상대 뺨을 호되게 후려쳐 무릎 꿇게 한다는 뜻의 북한 말)"는 지시가 내려오면 9국(전략기획 부서)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글을 쓴다. 미국이나 남측을 향한 비난 글을 쓸 때는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펜으로 원수의 심장을 찌르는 심정으로 쓰라"고 외교관들을 교육한다. 은유를 써서 적대국이나 적대 인물을 향해 험한 표현을 써야 상대의 기를 죽일 수 있다고 본다.

외무성 어휘집엔 구체적인 표현 지침도 있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고조시켜야 할 때는 '전쟁 개시의 격발기는 당겨졌다'고 표현하고, 협상에서 상대가 북한 의도를 모르게 하자고 할 땐 '저팔계 전술로 모든 것을 뿌옇게 한다'고 써야 한다. 김정은에게 보고할 땐 전술적 의도를 명확히 보고해야 한다. '미친놈 전술' '안고 돌다가 순간에 대방(상대방의 북한식 표현) 코 콱 무는 급소전술' 등 쏙쏙 귀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 외신용 번역을 해야 할 때도 있는데 뉘앙스를 살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군대 관련 성명은 북한군 내부 정찰총국 산하 전략 기획 담당 부서에서 쓴다. 여기에 글만 전문으로 쓰는 인원이 100명 이상 있다. 대체로 논평 쓰는 인력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나 어문학부 출신, 김형직사범대 출신의 최고 엘리트들이다. 전문 작가가 글쓰기를 가르치지는 않지만 내부적으로 쌓인 노하우를 수십년 반복했기에 글쓰기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들이다. 논평이나 전술안(협상에 나가기 전 전술적인 문제를 보고하는 문건)을 잘 써서 승승장구하는 이도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막후 역할을 했던 송호경(사망, 당시 통전부 부부장)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젊어서부터 독설과 유머, 착착 달라붙는 비유 담은 글로 이름 날렸던 인물이다. 글 잘 써서 외무성 부상, 통전부 부부장까지 올라갔다. 리용호 외무상, 김계관 전 1부상, 하노이 미·북 실무 협상 시 북측 대표 김혁철, 최근 미국 담당 부상에 오른 리태성도 대외용 글을 잘 써서 승진한 인물로 꼽힌다.

북한이 품위 있는 용어를 사용하면 설득력을 더 높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데 모르는 말씀이다. 여론전이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 사회에서 '맵짠(맵고 짠, 즉 자극적인)' 표현을 쓰지 않으면 해외 언론들이 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거친 표현으로라도 시선을 잡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다. 나도 북한에 있을 때 책을 보다가 유머나 '맵짠' 표현이 나오면 기록해 두는 수첩이 있었다.

북한 언론의 얼굴인 노동신문사의 당력사교양부, 당생활부, 사회주의교양부 기자들은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표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미사일 발사 실험이 성공했을 경우 그저 성공했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요란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고 눈부신 섬광을 내뿜는 주체탄들이 대지를 박차고 기운차게 날아올랐다"고 표현한다.

조평통은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비난했다. 장금철 통전부장이 최종 손을 보고 김정은이 결재했을 것이다. 일부에선 '돼지머리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소머리라고 했을까. 혹시 돼지머리라고 하면 김정은이 연상돼서 그런 것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삶은 소대가리도 웃다 꾸레미(꾸러미의 북한말) 터진다"는 표현을 종종 쓴다. 소머리를 삶을 때 주둥이에 꼬챙이 등을 꽂아 꾸러미를 만드는데 죽은 소조차 너무 어이없어 한껏 입 벌리고 웃다가 꾸러미가 터질 지경이라는 뜻이다. 주변에서 남한에서는 생소한 표현이라며 재미있어하기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삶은 소가 웃다가 꾸러미 째지겠다"는 속담이 등록돼 있었다. 한국에도 있는 말인데 요즘은 많이 쓰지 않는 모양이다.

개별 인물을 공격할 때는 인종, 성, 나이, 행동, 말투 등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꼬집어 사회적으로 망신을 준다. 과거 미국 오바마 대통령에겐 "아프리카 원숭이"라는 인종주의적인 표현을 쓴 적이 있다. 70대에 대통령이 된 트럼프에겐 "미친 병든 늙다리"라는 표현을 썼다. 일본 아베 총리는 "평화를 위협하는 사무라이 후예"라고 부른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겐 "시집 못 간 노처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겐 "박쥐"라고 했다. 문 대통령에겐 걸음걸이를 빗대 나온 것으로 보이는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는 막말을 했다.

며칠 전 북한은 박지원 의원을 향해 "설태 낀 혓바닥을 마구 놀려대며 구린내를 풍기었다"면서 "노죽(아첨)을 부리던 연극쟁이"라고 인신공격을 했다. 박 의원처럼 북한과 오랜 관계가 있는 인사에게 모욕적 발언을 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가차없이 친다는 것이 북한의 정치 논리다. 약점을 꼬투리 삼고 구체적으로 언어 테러를 가하면 당사자의 반북 감정이 누그러진다고 본다. 자신의 약점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게 창피해 북한에 대한 언급을 자제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막말 공세로 반짝 효과를 볼지는 몰라도 결국 북한 스스로가 정상 국가가 아님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북한도 말초적인 막말 공세는 그만하고 정상 외교를 했으면 한다.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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