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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나의 '고막 절친', 너 없인 하루도 버틸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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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6000명에게 물었다… 나에게 이어폰이란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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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이 피부 같아요."

김현서(19)씨는 "이어폰을 집에 두고 나온 날에는 불안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물건이 귀에 꽂혀 있지 않으면 불편하고 조마조마하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린다면 주위를 둘러보시라. 출퇴근길 전철과 버스, 카페와 사무실에는 유선 이어폰이든 블루투스 이어폰이든 귀를 틀어막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에는 윗사람에게 예의를 표하기 위해 모자를 벗었다. 요즘엔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인사한다. 이어폰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실제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지난 19~21일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로 물었다. 10대부터 60대까지 6041명이 응답했다.

나만의 시공간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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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020세대에게 이어폰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도구다. '이어폰이 없으면 삶의 질이 낮아지느냐'는 질문에 20대의 64.6%, 10대의 47.9%가 "그렇다"고 답했다. 50대(35.7%)와 60대(30.4%) 응답의 두 배에 가깝다. 20대 다섯 명 중 한 명은 이어폰이 없다면 삶의 질이 매우 낮아진다고 했다.

이어폰의 부재를 두려워하고 의존하는 성향은 20대에서 가장 강하다. '이어폰 없이 얼마나 생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어폰이 없으면 안 된다'고 답한 20대는 27.5%. 10대(21.5%), 30대(19.1%), 40대(14.4%), 50대(11.7%), 60대(9.9%)에 비해 단연 높았다. '하루'라고 답한 비율을 합하면 20대의 절반가량(48%)이 이 물건 없이는 하루 이상 버티지 못한다고 고백한 셈이다. 김현지(22)씨는 "이어폰 없이 외출하면 당황하다가 분노하다가 절망한다. 이어폰이 없으면 일상이 지루해진다"고 했다.

"이어폰을 두고 나왔을 땐 집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편의점에서 싼 이어폰을 바로 사요. 이어폰을 살 때는 언제 고장 날지 모르니까 두 개씩 사고, 집과 사무실에도 비치해둡니다." 강지인(28)씨는 "주변 소음 없이 오롯이 내 페이스에 맞춰 집중할 수 있어 일할 때도 이어폰을 낀다. 이어폰 없이 하루를 시작하면 무기력해진다"고 했다. 20대의 3분의 1(32.7%)은 '이어폰이 망가졌을 때 편의점에서 급하게 사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전체 평균(21.7%)보다 10% 이상 높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혼술·혼밥·혼영처럼 고독을 즐기는 경향이 이어폰으로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 듣는 청각의 개인화로 이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물리적으로 나만의 시공간을 소유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젊은이들은 택시를 타는 대신 전철에서 이어폰을 낀다. 값싸고 효율적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50~60대도 이어폰으로 개인주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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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지하철은 오래돼서 소음도 엄청나게 커요. 통근 시간 이어폰도 없이 시달릴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하죠." 영국 런던에 사는 김모(27)씨는 이어폰을 깜빡하고 나올 때를 대비해 여분의 이어폰을 자주 쓰는 가방들에 미리 넣어 둔다.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 이어폰을 꼭 챙기는 사람은 한국에도 많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이어폰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때'로 절반 가까운 응답자가 이동할 때(48.2%)를 꼽았다. 휴식할 때(25.4%)와 일·공부 등 집중할 때(17.9%)가 뒤를 이었다. 특히 '이동할 때 이어폰을 얼마나 쓰는지' 묻자 10대의 29.5%와 20대의 29.9%가 '항상 이어폰으로 뭔가를 듣는다'고 답했다. 이런 응답은 50대에서는 10.5%, 60대에선 8%에 그쳤다.

플라스틱으로 된 이 작은 물건을 사용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노래나 영상을 듣기 위해'(50.9%) 이어폰을 쓴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지만 '주변 소음을 막기 위해'(24.1%) '방해 없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서'(13.4%)라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권지윤(23)씨는 "카페에서 책을 볼 때 이어폰을 자주 쓴다. 이어폰이 없으면 다른 소리에 신경이 쓰여 집중이 안 된다"고 했다. 김현서씨는 "이어폰을 끼면 다른 사람의 소리가 차단돼 남들 시선을 덜 의식하게 된다. 집 밖에 있어도 내 방에 혼자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롭게도 '주위 소음 차단하기 위해' 또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서' 이어폰을 쓴다고 답한 응답자가 세대가 높아질수록 많아졌다. '주변 소음을 막기 위해' 이어폰을 쓴다는 답변은 60대에서 31.4%로 으뜸이었고 50대(26.3%), 40대(25%), 30대(22.2%), 20대(20.4%), 10대(19.2%) 순이었다. '방해 없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서'라는 응답도 60대(16.9%), 50대(15.4%), 40대(14.4%)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청년층은 개인주의적이고 중장년층은 공동체주의적이라는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결과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대를 넘어서 개인주의가 보편적 가치가 됐다. 중장년층도 자기만의 공간과 프라이버시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인주의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청년층과 달리 기성세대는 개인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어폰이라는 도구를 활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노래(60.1%) 다음으로 이어폰으로 가장 많이 이용한다고 꼽힌 콘텐츠는 유튜브 영상(21.9%)이었다. 이어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노래보다 많이 듣는다는 답변은 10대(24.4%)와 20대(23.1%)에서 가장 높았다. 하지만 50대(23%)와 60대(22.7%)도 1020세대만큼 유튜브 영상을 보기 위해 이어폰을 쓰는 것으로 조사됐다. 30대는 19.4%, 40대는 18.8%가 유튜브를 골랐다.

난청과 사고 위험, 그래도 포기 못 해

응답자의 14.6%가 하루 6시간 이상 이어폰을 쓴다고 답했다. 이어폰을 많이 쓰는 20대의 4.3%, 10대의 4.2%는 무려 12시간 이상 이어폰을 착용한다고 했다. 그만큼 난청의 위험도 커진다. 22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건강보험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난청 환자 수가 2013년 28만2487명에서 2018년 37만4299명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5년 새 33% 증가한 수치다. 2018년 전체 난청 환자의 10.2%는 10~20대였다.

이어폰을 '한 몸처럼' 여기며 거리를 걷다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어폰을 사용하다 주위 소리를 듣지 못해 위험했던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3분의 1(33%)이 그렇다고 답했다. 김상욱(23)씨는 "거리에서는 위험하니 이어폰을 빼라는 경고를 지인들에게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이어폰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인생의 BGM(배경음악) 같아요. 세상사에서 벗어나 그 순간만큼은 삶의 주인공이 됐다고 느끼거든요."

이어폰은 사람으로 빽빽한 도시에서 나만을 위한 공간을 뚝딱 만들어주는 사회적인 액세서리다. 이어폰을 끼는 행동만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발산한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당신들과 분리돼 있다'.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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