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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의료시스템 상업화의 그늘을 메운 ‘방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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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노르웨이 드라마 ‘발키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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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대학 병원의 면역학자 빌마(피아 할보르센)는 슈퍼박테리아 치료법을 연구하던 중 뇌사 상태에 빠진다. 그의 동료이자 남편 라븐(스벤 노르딘)은 빌마를 구하기 위해 병원도 그만두고 빌마가 진행하던 연구를 이어간다. 도시 비상계획부 직원이자 종말론자인 레이프(팔 스베레 하옌)는 라븐에게 비밀 연구처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불법 클리닉 개설을 요구한다. 지하 방공호에 문을 연 라븐의 임시 진료소는 의료시스템을 불신하거나 그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대안이 된다.

2017년 세계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로 호평받은 노르웨이 미니시리즈 <발키리>(원제 ‘Valkyrien’)는 독특한 메디컬 스릴러다. 화려한 수술 장면, 병원 내 권력 투쟁, 의료인들 간의 갈등과 사랑, 의료진과 환자들의 유대감 등 흔히 메디컬 드라마의 흥행 공식으로 불리는 요소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병원 대신 어두운 지하 방공호를 배경으로, 고독한 의사와 그의 유일한 환자인 뇌사 상태 아내, 그리고 신분을 감추고 방문한 클리닉 고객들만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드라마의 중심 배경인 방공호의 존재다. 세계대전 당시 공습을 피할 목적으로 지어진 수많은 방공호는 냉전 시대에도 핵전쟁의 피난처로 계속 건설됐다. 냉전 시대의 종식과 함께 주기능을 상실한 방공호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 대비해 소수의 사람에 의해 관리되고 있고,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 존재조차 잊혔다. <발키리>는 그중에서도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하루에도 수백명이 바쁘게 오가는 발키리 광장의 폐쇄된 유령역 아래, 바로 그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재난과 구원,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이 기묘한 공존을 이루는 방공호의 독특한 성격은 <발키리> 속 불법 진료소의 특징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지만, 동시에 어디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동에서 온 난민 여성 환자다. 유방암에 걸린 그는 노르웨이 이민국과 경찰의 추방이 두려워 병원에 가지 못한다. 불법 진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라븐은 환자에게 무료 수술을 행하며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낸다.

<발키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복지 국가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 의료시스템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2012년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노르웨이 다큐멘터리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이 포괄수가제 도입 이후의 폐해를 낱낱이 파헤쳤다면, <발키리>는 그 후유증이 이야기의 밑바닥에 무겁게 깔렸다. 공중보건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고 방공호 진료소를 찾는 사람들이나, 빌마의 질환 연구를 이용하려는 오슬로대학 병원 임원진의 모습을 통해 기존 의료시스템을 파고든 상업화의 그늘이 짙게 드러난다.

드라마 클라이맥스에서 오슬로를 덮친 재난 상황 가운데 라븐의 지하 진료소는 위기의 공동체를 구하는 구원과 희망의 장소가 된다. 어두운 방공호가 상업화에 훼손당한 의료공공성의 구멍을 메우는 노아의 방주로 변할 때, 메디컬 드라마로서 이 작품의 진짜 가치가 빛을 발한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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