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눕터뷰]'음악을 그리다'…가수 솔비에서 화가 권지안으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세상 끝에서 치유로 다가온 그림

그림으로 선한 영향력 미치고 싶어

캔버스에 음악을 그린다?

권지안(34) 작가의 그림은 파격적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도구로 쓴다. 물감들의 전개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다가도 자연스레 섞여 들어간다. 그리고 항상 배경음악이 등장한다. 캔버스 위 몸짓은 춤사위를 연상시킨다. 추상화로 결과지어지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우연한 흐름 같지만 철저한 계획으로 진행된다. 음악, 몸짓, 형형색색의 물감이 어우러진 행위는 ‘계획된 우연성’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중앙일보

가수 솔비에서 화가로 변신한 권지안 작가가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림, 도구들과 함께 누웠다. 그는 연예인으로 활동 중 슬럼프를 겪고 마음의 폐허 위에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장진영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권 작가의 또 다른 이름은 가수 ‘솔비’. 2006년 혼성그룹 타이푼의 메인보컬로 데뷔했다. 솔직함과 엉뚱함을 무기로 각종 예능프로그램을 오가며 종횡무진 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가 치유의 미술을 표방하며 화가 권지안으로 돌아왔다. 지난 2012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2015년에는 ‘음악 하는 솔비’와 ‘미술 하는 권지안’, 두 개의 자아가 협업을 하는 ‘셀프 콜라보레이션(self-collaboration)’을 선보였다. 얼마전 4번째 개인전을 마친 권 작가를 경기도 양주 작업실에서 만나 가수에서 화가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 그간의 작업을 모아 ‘Real Reality’ 전시를 마쳤는데

A : ‘레드’, ‘블루’, ‘바이올렛’ 컬러 시리즈를 3년간 진행했다. 레드는 여성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 블루는 계급사회의 부당성과 사회계층의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바이올렛은 사랑이 주제다. 인간 최초의 사랑과 원죄를 표현했다. 아담과 이브가 하늘에서 춤을 춘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프랑스 현대 무용가와 협업했다. 전시 주제처럼 '우리의 진짜 현실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불편한 진실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중앙일보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권지안 개인전 ‘Real Reality’. [사진 MAP크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반응은 어땠나

A : 전시 장소가 인사동이었는데 ‘솔비’인줄 모르고 온 관람객이 많았다. 전시 기간 내내 갤러리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들었다. 전시장을 다섯 번이나 찾아주셨던 할아버지가 기억에 남는다. 전시 첫날은 우연히, 다음엔 생각나서 또 오시고, 작가가 궁금해서, 작가를 알고 나니 그림이 다르게 보여서, 그러더니 마지막 날까지 오셨다. 신선하고 넘치는 에너지를 받고 간다고 말씀해주셨다. 또 다른 분은 레드 퍼포먼스를 보시고 오랫동안 함께한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그런 반응을 들으니 그림으로 소통했다는 게 신기하고 뿌듯했다. 선입견 없이 작품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연예인 솔비로 살아오면서 대중들에게 웃음을 많이 줬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화가 권지안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중앙일보

Hyperism RED 92x172 Mixed media on canvas 2017. [사진 MAP크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작품의 장르가 추상화다. 친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A : 알고 있다. 보는 이들이 '불친절하게 느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으로 영상과 퍼포먼스도 함께 했다.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설명했다. 장르는 순수예술, 전달은 대중예술이다.

Q : 치유를 목적으로 미술을 시작했다고

A : 연예인으로 잘 나가다 슬럼프가 왔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다. 결국 '오해'로 판명이 났지만, 상처가 남았다.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꿈이었는데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지인의 권유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고 마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것에 힐링이 되었다.
중앙일보

Hyperism Red 211x153 Mixed media on Canvas 2017 [사진 MAP크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솔비로 사는 게 힘들었나

A :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다. 내가 아니라곤 할 순 없겠지만 솔비의 이미지는 만들어진 캐릭터다. 나답게 살지 못해서 힘들었다. 때론 숨고 싶기도 했다. 가수라는 하나의 꿈만 보고 달려왔던 건데 그땐 성공을 누릴 줄 몰랐다. 그릇이 안 된 상태에서 너무 큰 것들이 주어졌으니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 열심히 했고 가수로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슬럼프를 겪으면서 느꼈다. 나답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성공을 위해 모든 걸 걸기보단 반만 걸더라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중앙일보

레드 퍼포먼스. [사진 MAP크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연예인으로 빛나는 직업이었다. 날것 그대로를 보여줘야 하는 화가 권지안의 출발이 두렵지는 않았나

A : 항상 두렵다. 미술을 할 때는 벌거벗고 있는 느낌이랄까. 일기장을 낱낱이 대중에게 공개하는 기분이다. 이전에는 포장하고 숨기고 살았다면 지금은 진짜 나를 드러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강해져야 하고. 내 일기장을 포장해서 보여줄 순 없다. 작품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진정성 있게 표현하고 있다.

중앙일보

권 작가는 선입견을 깨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화가 권지안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A :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계속 고민한다. 타인에게 보이는 건 순간순간일 뿐이다. 그리고 철들고 싶지 않다. 세상을 다 알게 될까 봐 두렵다. 하나만 알고 사는 게 덜 피로하지 않을까. 어린아이의 세상처럼 순수함과 단순함 속에 살고 싶다. 작업실 이름인 ‘빌라빌라콜라’는 말괄량이 삐삐네 집 ‘빌라빌레쿨라’에서 따왔다. 동화 속 순수한 공간처럼 만들고 싶다.

Q : 작업 주제들에 깊은 사연이 담겨있는 듯하다

A : 포장된 삶을 오랫동안 살았다. 최대한 날것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난 제로가 아닌 마이너스에서 출발했다. 항상 결핍이 있다. 그것을 스스로 채우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의 상처가 많이 나왔다. 나만의 이야기가 여러 시리즈를 거치면서 서서히 스타일이 변해가고 있다.

중앙일보

블루 퍼포먼스. [사진 MAP크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캔버스 위에서 그림도 그리고 춤도 춘다

A : 음악, 춤, 그림은 내 삶이 담긴 결정체다. 어릴 때부터 가수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춤과 음악을 증발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것들은 치유의 과정으로 오랫동안 함께 할 친구다.

중앙일보

지난 2015년 발표한 '공상'. 작업실에 전시되어 있다. 장진영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작업이 즉흥적인 결과물처럼 보인다

A : 모든 작업은 철저한 계획으로 진행된다. 안무와 색의 배합을 예상하고 캔버스 위의 동선을 짠다. 물감 위 움직임은 많이 미끄럽기 때문에 많은 연습이 필요하고 파트너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재료의 성질과 물감들이 섞여 어떤 결과를 낼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첫 작품인 ‘공상’의 경우 약 6개월간 연습했다. 온몸에 멍이 다 들었다. 내 작업은 계획안에서 우연성으로 기록이 된다.

중앙일보

바이올렛 퍼포먼스. [사진 MAP크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캔버스 위에서 어떤 생각을 하나

A : 내 흔적의 기록에만 집중한다. 행위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많이 한다. 무의식을 항상 믿는데 몸이 도구가 되어 무의식에 빌려진 느낌이다. 몰입도가 강해 주변 관객들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조건적으로 내 흔적의 기록에만 집중한다. 마치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긴 것처럼.

Q : 주류 미술계가 신경 쓰이지는 않나

A : 신경 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들의 반응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다만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표현의 자유에 있어 타인으로부터 억압된 시선의 자유로움 말이다. 나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고 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계속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꾸준함’만이 유일한 무기인 것 같다. 나는 노력해서 화가에 도전했다. 그런 모습이 타인의 시선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중앙일보

Hyperism Blue 300x300cm Mixed media on canvas(3). [사진 MAP크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해외로 진출하면 선입견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나

A : 지난 1년간 스페인과 파리를 오가며 작업했다. 그곳에선 선입견 없이 작가로만 나를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 성과도 있다. 오는 10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2019 라 뉘 블랑쉬 파리(La nuit blanche, White Night)’에 참가한다. 매년 10월 첫째 주 토요일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파리 곳곳에서 벌어지는 문화 축제다. 매해 200만 명의 관객이 찾는다. 미디어아트, 회화,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가 선보여진다.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해 전 세계에서 30명이 선발됐다. 한국인으로는 내가 유일하다. 뭔가 해낸 느낌이다. 그림과 퍼포먼스를 함께하는 점을 좋게 봐준 것 같다.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김수자·최정화 작가 등이 참가했었다.

중앙일보

주기마다 발표한 세월호 추모 메시지 그림. 2019년. [사진 MAP 크루]


중앙일보

주기마다 발표한 세월호 추모 메시지 그림. 2015년. [사진 MAP 크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주기마다 발표한 세월호 추모 메시지 그림. 2016년. [사진 MAP 크루]


중앙일보

주기마다 발표한 세월호 추모 메시지 그림. 2017년. [사진 MAP 크루]


중앙일보

주기마다 발표한 세월호 추모 메시지 그림. 2018년. [사진 MAP 크루]



Q : 최근 몇 년간 세월호 추모 메시지를 발표하고 아이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표하고 있다

A : 힘들었을 때 사회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힘 안에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진정성 있고 꾸준하게. 세월호는 모든 이들이 그렇겠지만 내 삶에서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어른이란게 상처로 남았다. 지난 2015년부터 나만의 방식으로 세월호를 추모하고 있다. 주기마다 그림을 발표한다. 잠실 창작 스튜디오에서는 발달 장애인들의 그림 멘토가 되기도 하고 보육원도 찾는다. 나도 결핍과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꾸준히만 한다면 그 행동들이 작은 씨앗이 되어 좋은 영향으로 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중앙일보

그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꿈을 탄탄하게 이뤄내고 싶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A :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느꼈는데 이제는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가수라는 첫 번째 꿈은 그릇이 되질 않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두 번째 꿈은 탄탄하게 이뤄내고 싶다.

사진·글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 눕터뷰

'누워서 하는 인터뷰'의 줄임말로, 인물과 그가 소유한 장비 등을 함께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의 인터뷰입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