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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살롱] "피고인 직업은?" "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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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안채원 기자] [the L] 죄형법정주의 지켜져야 하지만…법원의 '직권·직위남용 불감증 관례' 반드시 바로잡혀야

머니투데이

사진=이지혜 디자인기자



"피고인 직업은 무엇입니까"

"판사입니다"

판사가 판사에게 물었다. 같은 법원에서 일하는 동료였던 이들이 사건 당사자와 재판장으로 만났다. 늘 법정에서 가장 높은 곳, 법대 위에 앉던 판사들은 피고인이 돼 법대를 마주 보고 앉았다.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신광렬 서울고법 부장판사(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와 그와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조의연 서울북부지법 수석부장판사·성창호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가 그 주인공이다.

예상대로 이들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가장 이목을 끈 건 성 부장판사였다. 성 부장판사는 '김경수를 법정에서 구속시킨 판사'로 유명세를 탔다. 드루킹 김동원씨와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1심을 맡았다. 성 부장판사는 이날 법정에서 "검찰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을 기소했다는 입장"이라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나머지 현직 법관 피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신 부장판사는 "직무상 마땅히 해야 할 업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한다"면서 검찰의 기소가 무리하다고 지적했다. 신 부장판사는 2016년 4월 '정운호 게이트' 사건이 법관 비리사건으로 비화되자 당시 영장전담 재판부에 있던 조·성 부장판사로부터 법원에 접수된 영장청구서·수사기록을 전달받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누설한 혐의 등을 받는다.

피고인들의 변호인 측은 "단지 내부 보고를 한 것을 비밀 누설로 볼 수는 없다"며 치열한 법적공방이 벌어질 것을 시사했다. 또 "(피고인들은) 20여년간 사법행정을 담당한 지식을 토대로 비위사항을 파악해 서울중앙지법 차원에서 대응해야 하고 행정처에 보고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라며 이른바 '관례'를 강조하기도 했다.

잠시 대법정으로 눈을 돌린다. 서울중앙지법 대법정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박병대 전 대법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공판이 열린다. 전 대법원장이 피고인이 된 초유의 사태라고들 하지만 사실 법정 분위기는 꽤나 화기애애하다. 한솥밥을 먹던 사이이자 선후배 사이인 피고인들은 재판 시작 전 서로 인사를 건네며 웃기도 한다.

이들의 여유는 이유 없는 여유가 아니다. 서초동에서는 기소 당시부터 이들에 대한 기소를 두고 '무리한 기소'가 아니냐는 전망이 조심스레 나왔다. 최근에도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들을 유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냐는 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나오고 있다. 직권남용죄의 성립요건이 워낙 까다로울 뿐더러 입증도 어렵기 때문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직권남용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무상 권한을 남용해서 누군가에게 부당한 지시를 했어야 성립하는 죄인데 이번 사건에서 '직위'를 남용했다고는 할 수 있어도 과연 '직권'을 남용했다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모든 기관에는 관례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심의관에게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관행을 직권 남용이라고 해버리면 앞으로는 어떻게 일을 하자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돌아보면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오르게 된 것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관례에 문제를 제기한 한 판사의 등장 때문이었다.

지금 사태의 시발점이 됐던 이탄희 전 판사는 자신이 법원에 사표를 냈을 때의 일을 회고하며 "저는 이것을 '판사가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해 사직서를 냈던 것인데 법원행정처에서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계속하면 된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법원행정처의) 불감증이 너무 심각하다고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 현직 법관들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진 건 유무죄의 판단을 별개로 하더라도 초유의 사태이자 사법부의 수치다. 법리적 판단은 '죄형법정주의(범죄와 형벌은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는 주의)'에 따라 법리적 판단대로 이뤄져야 하겠지만, 지금의 사태가 단지 '관례'라는 단어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는 분명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법리적 판단이라는 명분 하에 지금 법원에 필요한 변화가 후순위로 밀려나지 않도록 지켜봐야 한다. 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잘못된 관행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채원 기자 chae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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