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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 집값에 배에서 산다, 런던 청춘들의 '우울한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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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의 유레카, 유럽

런던 도심 운하 따라 거주용 좁은 배 빼곡

2주마다 이동…노인층까지 주거형태 변화

"부모 도움 없이 구매 불가능" 주택 양극화

집값 160% 뛸 때 젊은층 소득은 23%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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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도심 이슬링턴구의 리젠트 운하에서 크리스티나가 주거용 배를 정박시키고 있다. 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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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현지시간) 오후 영국 런던 도심 1존에 속한 이슬링턴구. 지하철역에서 5분 정도 걷자 주택가 사이에 폭 10여m의 '리젠트 운하'가 나타났다. 운하 한편에 폭이 좁은 배가 줄줄이 정박해 있다.

‘내로우 보트'(narrow boat)로 불리는 이 배들은 대부분 출입문이 닫혀 있었다. 지붕에 자전거나 바비큐용 그릴이 놓여 있고, 창가에는 화분이 매달려 있었다. 생수가 놓여 있거나 빨래를 널어놓은 배도 보였다. 이곳 배들은 관광이나 상업용이 아니라 주거 시설이다. 배에 사는 이들은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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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도심 리젠트 운하 한편에 주거용 좁다란 배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다. 뒷편으로 고급 주택이 보인다. 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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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미로처럼 뻗어있는 운하의 터널에서 마르코와 크리스티나가 배를 타고 나타났다. 30대 중반인 두 사람은 동거 중인데, 소형 아파트에 해당하는 플랫에 살다 2년 전 배로 이사했다.

정박장에 밧줄을 묶던 크리스티나는 “2만5000파운드(약 3700만원)로 배를 샀는데, 임대료가 들지 않으니 생활비가 확실히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직장이 런던 서쪽인데, 아침이면 배를 묶어놓고 출근한다"며 “여기 같은 런던 중심부에 집을 임대하려면 엄청난 월세를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동산 중개사이트에는 이슬링턴구에 있는 방 하나, 거실 하나짜리 플랫의 월세가 1300~2000파운드(약 200만~300만원) 수준으로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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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평균 집값 상승률이 젊은층 평균소득 증가율보다 훨씬 높아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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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커플이 사는 배의 내부. 폭이 좁지만 조리기구와 세면대, 침대, 소파 등이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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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이 좁지만 배 안에는 부엌과 세면대, 침실, 거실 등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배 크기에 따라 매년 일정액을 납부하면 런던의 운하를 이용할 수 있다. 정박 장소에 마련된 시설에서 수돗물도 끌어다 배에 채울 수 있다.

불편한 점도 많다. 크리스티나 커플은 2주마다 머물 장소를 옮긴다. 한 곳에 그 이상 머물면 벌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요즘은 배에서 사는 이들이 많아져 런던 중심부 운하에서 배를 댈 곳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엔진에 문제가 생기면 손수 고쳐야 하고 난방이 잘 되지 않아 겨울에 춥다. 창문을 깨고 물건을 훔쳐가는 일도 있다고 크리스티나는 전했다. 마르코는 “우리가 돈을 더 벌더라도 런던에 집을 살 생각은 없다. 더 큰 배를 살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런던 시민들이 주거 대안을 찾아 나섰다. 배를 타고 이동하며 사는 이들이 늘어나는 등 새로운 유형과 소유 형태가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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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도심의 아파트 사이에 있는 운하에 주거용 배들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벌금을 내지 않기 위해 2주마다 정박지를 옮긴다. 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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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용 배를 판매ㆍ임대하는 리버홈스사의 라나 라이트만 홍보담당자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주거용 배에 대한 수요는 전례가 없을 정도"라며 “지난 10년간 두 배가량 증가했다"고 전했다.

임대료를 아끼기 위해 대학생들도 저렴한 배를 구매해 재학 기간 동안 거주하기도 한다. 학생들에게 재무 관리 조언을 해주는 한 단체는 런던대(UCL) 3학년생 두 명이 작은 배에 살며 학업을 이어가는 모습을 사이트에 소개했다.

이들은 도심 운하를 옮겨 다니는데, 샤워 시설이 없어 학교에 설치된 무료 샤워장을 이용하고, 빨래는 유료 ‘빨래방’이나 친구 집을 이용했다. 별도 난방시설이 없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귀가하자마자 요리를 시작해 배 안을 따뜻하게 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드는 식으로 견뎌냈다. 하지만 2주마다 바뀌는 정박장 주변의 특색있는 풍광을 보며 눈을 뜨는 경험은 비할 데 없는 장점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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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의 문을 닫고 출근하면서 빨래를 널어 놓은 모습. 샤워실이 없는 배에서 사는 대학생들은 학교 샤워장을 이용하고 있다. 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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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만은 “젊은층과 이혼한 이들도 선호하지만 주거용 배를 구입하는 노인층도 상당히 많다"며 “기존 주택을 처분한 뒤 작은 아파트로 가지 않고 시설이 잘 갖춰진 배로 이사해 여행하듯 옮겨 다니며 사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직장과 가까운 런던 중심부에 살기 위해 형제가 배를 공동 구매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집값 상승은 젊은층 내에서도 주택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다. 라이트만은 “런던에 사는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집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부모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자녀의 주택 대출 보증금을 대거나 보증을 서준다"고 말했다. 부모의 도움이 없다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까지 고스란히 저축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정도라는 것이다.

영국의 주택 및 가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가계 소득이 세후 4만1000파운드(약 6000만원)가량인 25~34세 연령대에서 집을 소유한 비율은 20년 전에 비해 20%포인트가량 줄었다고 BBC가 보도했다. 소득이 1만5000파운드 이하인 젊은층에서는 8%만 주택을 갖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주택 가격은 160%가량 뛰었지만, 젊은층의 소득 증가율은 23%에 그쳤다. 주택 사다리를 오르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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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박장에는 물을 끌어다 채울 수 있는 시설이 있다. 겨울에 추위를 견뎌야 하지만 2주마다 새로운 풍광을 보며 눈을 뜨는 즐거움이 있다고 배에서 사는 이들은 말했다. 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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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게 되자 두 커플이 주택을 공동 구매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코드니 맥루어 부부는 “런던 남쪽에 방이 6개인 집을 샀는데 정원도 있고 거실도 크다. 친구인 다른 커플과 비용을 분담했는데, 우리 돈만으로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집을 구할 순 없었다"고 BBC에 말했다.

영국 금융기관들도 밀레니얼 세대의 이런 경향을 고려해 주택담보 대출을 네 명을 상대로 내주는 상품을 내놓고 있다. 런던 주변에는 개조한 밴 차량에서 살거나, 컨테이너를 개조해 살인적인 임대료를 피하는 이들도 등장하고 있다.

사디크 칸 런던시장은 주택난을 줄이기 위해 2022년까지 형편이 어려운 이들도 감당이 가능한 주택 11만6000가구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로부터 관련 예산도 배정받았다. 이 예산으로 ^저소득층용 임대 주택 ^평균 수준의 소득이 있지만 주택 구매를 위해 저축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임대 주택 ^혼자 구매할 수 없어 공동 소유하려는 이들에게 공급할 주택 등을 지을 계획이다.

영국 정부는 18세 이상 저소득층이나 실업자에게 주택 자금을 지원한다. 개인 주택에 세들어살 경우 임대료용으로 보조금을 준다. 주택 담보 대출을 받은 저소득층이라면 정부가 대출 형태로 지원금을 준 뒤 집을 팔면 갚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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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25~34세에 집을 사는 비율은 20년 동안 크게 줄었다.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젊은 층의 주택 구입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부동산 관계자는 말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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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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