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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20년 전 자식 버려놓고…“나를 부양해라” 뻔뻔한 부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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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주면 소송하겠다” 으름장

민법 부양의무 있지만 자녀들 억울

최근 ‘빈곤노인 국가 책임’ 인식

“민법도 사회상 반영해 고쳐야”

“아버지는 저를 버렸었는데, 저는 그럴 수 없는 건가요?”

지난해 결혼한 김미정(가명·34)씨는 아버지 때문에 1년도 채 되지 않아 부부 관계가 소원해졌다. 약 20년 전 김씨의 어머니와 이혼한 뒤 연락 두절이던 아버지가 최근 “부양료를 달라”고 요구하면서부터다. 아버지 김씨는 “너랑 사위는 잘 살고 있으니까 돈을 벌 수 없는 나에게 월마다 부양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양료를 주지 않으면 ‘부양료 청구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과의 관계도 삐걱대기 시작했다. 김씨는 “아버지로부터 그 어떤 경제적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며 “이제 와서 돈을 달라는데,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의 의사와 달리 민법상 자녀는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지고 있다. 민법(974조)에는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간에는 서로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돼 있다. 또 ‘부양 의무는 부양을 받을 자가 자기의 자력 또는 근로에 의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이행할 책임이 있으며, 부양받을 자의 생활 정도와 부양의무자의 자력 등 제반사항을 참작해 정한다’(975조, 977조)고 돼 있다.

이처럼 민법에 부양의무가 명시돼 있는 만큼 아무리 자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라도 소정의 부양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박재우(법무법인 시선) 변호사는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부양 의무가 소멸한다고 보지 않는다”며 “법에 정해놓은 것을 감정에 따라 처분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김씨의 경우에도 전문가들은 “최소 월 10만원 이상의 부양료가 발생할 수 있다”고 봤다.

박병규(법무법인 이로) 변호사는 “상담을 진행해 보면 어렸을 때 폭행을 행사하던 아버지가 몇십년 만에 연락이 와서 ‘자식 도리를 다 해라’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자녀 입장에서 볼 때는 돈도 문제겠지만, 보기도 싫은 사람을 부양해야 한다는 억울함이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아동학대로 친권을 박탈당한 부모라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자녀의 부양의무까지 사라지진 않는다. 물론 이 경우 법정까지 갈 경우 자녀의 부양의무가 인정되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소송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부담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때문에 부양의무 조항도 좀 더 촘촘하게 보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노인 빈곤과 가족 해체 문제가 심화되면서 부양의무를 바라보는 가치관도 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과거에는 ‘부모를 자녀가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빈곤 노인은 국가가 더 많이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부양의무를 명시한 민법 974조는 ‘효의 가치’를 명문화한 것이다. 박병규 변호사는 “정말 ‘아닌’ 부모에 대해서까지 부양의무를 무조건 진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라며 “입법으로 부양의무를 조정하는 게 지금까지는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조정할 때가 된 거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 동안 접수된 부양료 청구 소송 건수는 252건이다. 2009년 195건이 접수된 이후 소폭 변동은 있지만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서울가정법원 한 곳에만 올해 들어 지난 8월 말까지 41건의 부양료 청구 소송이 접수됐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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