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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반경 1㎞에 마트·백화점 5곳… 그래도 안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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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석 경기도 부천의 중동시장은 작년 추석 때에 비해 풍경이 완전히 달랐다. 시장 내 200여 가게마다 가게 주인이 자신의 대표 상품을 품에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이 담긴 가로 100㎝·세로 50㎝의 작은 간판을 내건 것이다. 가게 상호와 점포 번호, 그리고 신용카드·상품권·카카오페이 등을 사용할 수 있는지, 배송 가능 여부 등이 한눈에 알 수 있게 표시돼 있었다. 손님들은 상인에게 일일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시장 상인들은 이를 '소프트 간판'이라 부른다. 지난 9일 중동시장에서 만난 문정희(52·청과물점)씨는 "상인이 사진을 내거는 것은 파는 물건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며 "지난해 추석보다 30~40대 손님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했다. 수산물 가게를 하는 정남환(57) 상인회장은 "올 추석엔 생선포를 뜨느라 잡담할 겨를조차 없었다"며 "작년보다 손님이 20~30% 늘었다"고 했다. 반경 약 1㎞ 안에 대형마트 3곳, 백화점 2곳 등 대형 유통매장 5곳이 포진한 중동시장이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작년 매출이 전년 대비 6.1% 성장하는 등 선전하는 비결은 상인들의 이런 노력 속에 있다.

◇가격 표시, 카드 사용, 환불 가능

1995년 문을 연 중동시장은 중동신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며 호황을 누렸다. 20년 넘게 채소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오세관(52)씨는 "그때는 나도 식사 좀 하게 손님이 덜 오셨으면 할 정도였다"며 웃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근처에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속속 문을 열자 손님들은 발길을 돌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2년 시장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곳에 7호선 부천시청역이 들어서면서 시장을 가로질러 1호선 중동역으로 출퇴근하던 발길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조선비즈

카카오페이로 결제되고 배달까지 OK -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9일 경기 부천 중동시장의 한 과일 가게에서 손님이 포도를 사고 있다. 중동시장은 점포마다 가게 주인의 얼굴 사진과 가게 이름, 점포번호가 들어간 안내판(오른쪽 상단)이 걸려 있다. 안내판을 통해 배달 서비스가 가능한지, 신용카드·카카오페이 등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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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은 2014년부터 생존을 위해 '수요 시장'을 시작했다. 손님이 가장 적은 수요일, 시장 통로 중앙에 평소 판매가보다 10~50% 할인된 특가 상품을 마치 '팝업스토어'처럼 내놓자는 것이었다. 축산물처럼 냉장·냉동이 필요해 상품을 통로에 내놓기 힘든 품목을 파는 상인들이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상인회는 "축산물 같은 경우는 상품 대신 상품 모형을 내놓을 수 있도록 하자"며 상인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수요 시장은 부천 지역의 맘카페 등에서 '수요일의 명소'로 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장사가 가장 안 되던 수요일 매출이 주말 매출을 넘어서자 줄어들기만 하던 중동시장 전체 매출도 2015년 이후 오름세로 돌아섰다. 정남환 상인회장은 "수요 시장이 성공을 거두며 젊은 소비자들이 늘기 시작하자 상인들도 '변하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내친김에 더 큰 변화를 시작했다. 상인회는 “가격표시제와 신용카드 사용이 정착되지 않으면 손님들이 모두 대형마트로 가고 우리는 다 같이 죽는다”며 상인들을 설득했다. 떡집을 운영하는 김정순(51)씨는 “정가를 써놔도 가격을 깎아달라는 손님들이 있어서 초기엔 할인 대신 ‘덤’을 얹어줘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가격표시제가 정착되자 2~3%대이던 매출증가율은 6%대로 치솟았다. 지금은 진열된 상품들의 가격은 모두 동일한 양식의 표시판에 표기돼 있다. 1000원 이하의 먹을거리 정도를 빼면 전 상품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 시장 입구 등에는 ‘교환·환불 매뉴얼’도 비치돼 있다.

◇수요 시장에서 시작된 성공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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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전통시장은 매대가 고객들이 오가는 통로까지 튀어나와 통행이 힘들고 어수선하다. 중동시장의 점포들은 모두 ‘고객선’이라 불리는 노란선을 지킨다. 지난 9일 추석 장을 보기 위해 시장을 찾은 박미선(59)씨는 “다른 시장은 툭툭 튀어나온 매대 때문에 오가기가 불편하고 카드 결제가 되는지, 정가가 얼마인지 알 길이 없어 불편한데 이곳은 다르다”고 말했다.

상인회는 지난해부터 시장 내 가장 큰 점포인 수퍼마켓 주인을 설득해 ‘고객선’ 지키기를 시작했다. 다수의 상인이 “큰 가게가 지키면 나도 지키겠다”며 눈치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연말부턴 모든 점포가 고객선을 지키고 있다. 시장 상인들과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함께 만든 중동시장 육성사업단의 김선호 단장은 “당장 진열할 수 있는 상품이 줄어드니까 손해 아니냐고 우려들을 했지만 결국은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간다는 믿음이 생기자 일사천리로 정착됐다”고 했다. 중동시장은 수도권 전통시장들의 견학 코스가 됐다. 김 단장은 “올해 들어서만 인천 부평, 군포 산본 등의 전통시장에서 버스를 빌려 타고 방문했을 정도”라고 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관계자는 “각자 눈앞의 이익을 좇는 각자도생 대신 시장 전체의 환경 개선에 동참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된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부천=김충령 기자(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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