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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신율의 정치 읽기] 제도를 준수 아닌 타도 대상으로 보는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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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동남아 3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6일 오후 국가위기관리센터를 찾아 태풍 ‘링링’ 대처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관계부처와 지자체로부터 태풍 대처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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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386(3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세대, 아니 586(5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세대가 요즘 다시 주목받는다. 조국 법무부 장관도 그렇고 조국 장관을 옹호하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상당수도 586세대기 때문이다.

586이 우리 현대사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상당하다. 엄혹하던 전두환 정권 시절, 그들은 자신의 삶과 생명을 던지며 온몸으로 저항했다. 일각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6·10 민주항쟁은 ‘넥타이 부대’ 등 일반 시민의 저항이었고, 따라서 일반인 덕분에 독재를 마감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틀린 분석은 아니다. 그러나 전두환 시절 내내 끊임없이 온몸으로 저항한 586의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6·10 민주항쟁이 전 국민적 저항운동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586의 희생은 그만큼 반독재 투쟁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민주화’ 대신 ‘반독재 투쟁’ 용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다. 민주주의는 ‘가치의 내면화’와 관계 있는 용어인 반면, 반독재 투쟁은 ‘행위 중심’의 단어다. 반독재 투쟁 성공이 민주주의의 기초가 됐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반독재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을 곧바로 민주주의의 가치에 충실한 ‘민주주의의 대명사’라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반독재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을 민주주의 가치에 충실한 세대라 보기에 무리가 따른다. 대표적인 근거로 집단주의를 들 수 있다. 586세대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중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이들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집단주의적 사고가 충만했던 시절이다. 중고등학교에서조차 군사교육이 이뤄졌으며, 집단적 사고와 집단주의적 권위주의에 충실한 사회적 규범이 강요됐다. 한마디로 586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강요된 집단사고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힘들었다.

이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이들이 대학에 들어가 마주친 현실은 주입된 집단사고 속에서 도저히 인식할 수 없었던 군사독재라는 재앙이었다. 그런데 이런 재앙 같은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방식도 집단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든 이념 서클은 공통적으로 집단적 방식으로 정치 사회적 모순을 학습시켰다. 이때 개인의 다른 생각은 허용되기 힘들었다. 방향만 바뀐 집단주의였던 셈이다.

당시의 혹독한 독재 아래서 이런 방향의 집단주의와 ‘학습을 통한 모순에 대한 인식’이 효과적인 항거 수단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반독재 투쟁은 국민의 은밀한 지지를 받았다. 이런 지지가 있었기에 586은 열심히 투쟁할 수 있었고, 투쟁 과정에서의 모든 행위가 합리화될 수 있었다. 심지어 제도를 무시한 행위가 당연시되기도 했다. 당시의 제도라는 것은 독재 유지의 도구이자 수단이라고 여겨졌고, 실제 그런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586에게 있어서 제도는, 준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뿐 아니라 전두환 정권의 혹독한 독재는 586으로 하여금 세상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586이 살아 있는 권력을 무조건 악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반독재 투쟁을 성공으로 이끌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586의 희생적 투쟁 덕분에 제도적 민주주의가 탄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분명 제도적 차원의 민주화는 이뤄졌지만, 586의 가치는 민주주의에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하지 못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제도는 바뀌고 민주적 방향으로 진화했지만, 586 마음속에는 제도를 무시하는 경향이 그대로 남았다. 우리 사회를 선과 악으로 나눠 바라보는 습관도 그대로 유지됐다. 이는 시민사회 성숙에 필수적인 사회자본 정착을 가로막았다.

사회자본이 무엇이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퍼트남(Putnam)은 사회자본을 네트워크나 사회적 신뢰, 혹은 규범을 통해 사회구성원 간의 상호 이득을 조정하고 협동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사회조직적 특성이라고 정의한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사회의 한 부분이나 특정사회 전반에 걸쳐 신뢰가 확산되고, 이때 발생하는 사회적 차원의 능력이 사회자본이라고 정의했다.

다양한 사회자본의 정의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사회적 신뢰’다. 사회적 신뢰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는 다르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감정적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미지가 좋으니까 그냥 믿을 수 있다 생각하는 식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는 제도에 대한 신뢰와 같이 이성적 차원에서 발생한다. 사회적 신뢰가 공고해지면 이를 통해 사회자본이 보다 튼튼하게 형성될 수 있다. 사회자본의 공고화를 통해 시민사회는 더욱 성숙해지고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착근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나라 586세대는 희생과 노력을 통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제도적 차원의 민주주의 생성에 지대한 기여를 했지만, 역설적으로 제도에 대한 이성적 신뢰를 우리 사회에 뿌리박게 하지는 못했다.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스스로 민주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들은 자신의 업적에 취해 자신들을 바뀐 사회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사회에 대한 사고(思考)적 적응을 거부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시간이 흘렀음에도 586은 아직도 세상을 적과 동지,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로 바라보며 자신들을 절대 선을 추구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아직도 자신이 피해자일 수 있다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과 다른 이념이나 생각을 가진 이들은 기득권 세력이라 언제라도 음모를 통해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다. 피해의식은 586이 스스로 사회의 엘리트로 성장했음을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 엘리트이자 권력을 가진 존재고, 그래서 그것을 누리면서도 왜곡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고 속에서는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말은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도 제도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튼실하지 못하고 사회를 이분법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586세대는, 엘리트 집단주의를 통해 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도를 이용한다. 그 와중에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은 당연히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에게는 무자비하지만 자신들에게는 관대함을 보이는 성향도 여기서 파생된다. ‘조국 정국’에서 나타난 조국 장관의 모습은 바로 이런 사고의 전형이었다. 제도를 최대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그럼에도 자신의 허물보다는 상대 허물을 무자비할 정도로 물고 늘어지는 것, 이는 바로 586의 전형적 사고에서 기인한 결과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민주적 가치에 충실한 세대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다. 지금 조국 정국에서 가장 분노한 세대가 바로 20대와 30대라는 것도 민주적 가치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성’과 관련 깊다. 공정함이란 사람이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제도를 충실히 운용하고, 또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때 나타난다. 결국 조국 정국에서 2030세대가 분노하는 것도 제도의 자의적 운용 때문인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민주적 가치의 내면화를 습득’한 세대와, 반독재 투쟁의 역사적 의미만을 되뇌며 민주적 가치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세대 간의 갈등이다. 이제 586은 자신들만이 모든 민주적 가치를 독점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반독재 투쟁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의 성숙에 기여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586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성과에 의해 역설적으로 공격당하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매경이코노미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25호 (2019.09.18~2019.09.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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