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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 불평등 보고서]‘있는 집’서 태어났다면…‘패자부활’은 남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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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영민 기자


경향신문은 ‘불평등 대물림의 시간’을 들어보려고 청년 5명을 만났다. 1990~1993년 사이 태어난 이들이다. 5명은 고등학교 학교생활세부사항기록부를 취재진에 건넸다. ‘생기부’로 불리는 자료다. 진학·구직 때 제출한 이력서, 각종 ‘스펙’ 증명 서류들도 모았다. 한두 차례 심층 인터뷰를 했다.


■ 중소기업 재직 박보미씨 ‘가정 형편 어려워 체념할 수밖에’

“어차피 똑같은 노예라면

돈 많이 버는 노예가 나아”


박보미씨(28·가명)는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한다. 서울의 이른바 ‘하위권’ 대학을 나왔다. 생활비와 등록금을 자신이 벌었다. 영어학원 강사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며 돈을 벌었다. 옷가게나 식당에서도 일했다.

아버지는 전기 배선 기사로 일했다.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박씨가 두 살일 때 아버지는 공사현장에서 추락해 2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일곱 살일 때 부모는 동네에 문방구를 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치킨 가게를 했다. 어머니는 틈틈이 건물 청소일을 하며 박씨 교육비를 댔다. “형편이 힘드니까 엄마는 맨날 ‘엄마 하기 싫다’고 했어요. 좁은 집이 싫고 혼자 있고 싶어서 독서실에 쉬러 갔어요.”

중학교 때 ‘전교권’ 학생이었다. 외국어고 입학을 준비하면서 한 달 30만원짜리 보습학원을 다녔다. 학원에서 경제 격차를 처음 실감했다. “부모의 ‘서포트’ 수준이 학원 같은 반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그 애들은 보습학원이 끝나면 다른 학원이나 과외를 또 갔어요.”

외고 시험에 떨어져 일반고에 진학했다. 모의고사 성적이 서울 상위권 대학을 갈 수 있는 수준이라 ‘정시’만 생각했다. 3학년 때 담임교사는 박씨 입시를 신경 써 주지 않았다. 박씨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 대학에 지원서를 냈다. “수시는 정보가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정보의 불평등’은 아예 인식하지 못했죠. 입학사정관 제도도 잘 몰랐어요. 학교생활을 성실하게 하면 선생님이 알아서 써주는 건 줄 알았어요.”

그해 수능은 ‘불수능’이었다. 수능 성적은 과목마다 늘 받던 등급보다 1~2계단씩 떨어졌다. 재수 끝에 입학했다. “저는 ‘개천에서 나는 용’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냥 ‘내 역량은 여기까지’라고 체념했어요. 더 좋은 환경이나 지원이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겠죠. 사회에 불만을 품지는 않아요. 그렇게 하면 나만 힘들잖아요. 제가 부모나 가정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입학 뒤 계속 학자금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강의가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생활비 대출을 받아서 부모에게 준 적도 있다. 기회가 생기는 대로 ‘스펙’을 만들었다. 캐나다의 한 대학에 교환학생으로도 갔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루 3개씩 하며 캐나다에 갈 돈을 벌었다.

4학년 때 학교 취업지원센터에 이력서를 등록했다. 한 중소기업의 인턴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 국제개발협력(ODA) 분야에 관심이 있었지만 포기했다. “똑같은 노예라면 돈을 많이 버는 노예가 낫죠. 유엔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와도 아무나 뉴욕에서 무급으로 살 수 있겠어요? 꿈도 경제적 뒷받침이 돼야 하는 걸요.”

회사 인근 26㎡(8평)짜리 원룸에 산다. 전세금 1억1000만원 대부분을 은행과 회사에서 빌렸다. 연애는 하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지만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 불평등은 자연법칙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끝내 오르지 못할 위치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계급이 있다고 본다. “개인 삶은 정부가 구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박근혜에서 문재인으로 정권이 바뀌었어도 제 삶은 바뀌지 않았어요. 애국심은 있지만 국가가 ‘민생’을 책임진다는 말은 믿지 않아요. ‘민생’은 개인이 알아서 하는 거죠.”

경향신문

김정근 선임기자


■ 운전기사 백성현씨 ‘불평등 세상, 패자부활은 남의 것’

“공부하려 일하고 돈 벌어

시험 떨어지니 낭떠러지”


백성현씨(29)는 한 정당의 운전기사다. 부모는 동네에서 빵집과 슈퍼를 했다. 장사가 잘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식당일, 택시운전을 했다. 지금은 찜질방에서 일한다. 아버지는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다. 어린 시절 백씨네 형편은 ‘삼시세끼 먹고살 수 있는 정도’였다. “평균 중 평균도 안됐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지금도 거의 일만 하시는 상태예요.”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고 봉사활동 하는 걸 좋아했다. 공부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아빠는 돈 벌고 엄마는 카운슬링한다는 시대라지만, 백씨는 저녁에나 부모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말까였다. 뺑뺑이로 들어간 인문계 고등학교는 입학사정관제도도 잘 몰랐다. “우리 기준은 ‘인서울인가 아닌가’ 정도만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경찰 시험 자격 요건으로 대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 낭비 돈 낭비 할 바엔 빨리 시험 합격해서 효도하자고 생각했어요.”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고 돈을 모았다. 커피전문점과 패밀리레스토랑 홀서빙, 은행 청원경찰 등을 했다. 택배 상하차 일도 했다. 하루 12시간 일하고 10만원을 받았다. 밥 먹는 시간 빼고 택배를 날랐다. 다음날 지쳐 일어나지도 못했다. “빽도 인맥도 기술도 없고, 부모님이 다리를 대주거나 정보를 주지 않는다면 알바 구인 사이트에서 열심히 찾은 일들은 이런 것뿐이에요. 젊은 기운에 덤비는 거지만 끔찍했어요.”

남을 돕는 일이 가치 있는 삶처럼 보여 경찰관을 꿈꿨다.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했다. “쉽게 잘리지 않고 보장된 일자리, 먹고사는 데 걱정 없을 급여 정도면 충분한 삶이라고 생각했죠.” 300만원을 모아 학원에 등록했다. 앞자리에 앉으려고 매일 오전 7시30분 학원에 갔다. 화장실 가는 시간만 정해놓고 공부했다. 수험생활 2년 끝에 마지막 시험에서 1점이 모자라 낙방했다.

경찰 꿈을 접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실패하면 뭐 어때’라고 말하죠. 모든 걸 다 바쳤어요. 그런 결과가 나오니까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낙오자’ 인생을 살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경제력이 되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지만, 저는 뭔가를 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시간을 들여 돈을 벌고, 그 돈을 다 내 꿈에 쏟아붓지만 안되면 낭떠러지예요. 안정된 일자리, 먹고살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삶이 모든 품을 들여도 될까 말까 할 기준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백씨는 힘겹게 노력해야 겨우 평균에 다다를 수 있는 사회가 이상했다. 백씨는 한국 사회에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가 있다고 본다. 부모에 따라 선택지가 달라지고, 불평등 격차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학벌 사회에서 ‘고졸’인 자신한테 붙는 딱지가 억울할 때도 있다. ‘실패한 삶’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려 한다.

백씨에겐 초등학교 2학년생 조카가 있다. 조카는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길 바란다. “사회가 ‘실패한 삶’들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기준을 맞추는 삶이 지금 청년들에겐 너무 힘들어요. 제 조카들은 사회 기준에 못 맞춰도 욕먹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수 있었으면 해요.”

경향신문

우철훈 선임기자


■ 대학원생 정재원씨 ‘나는 강남 태생…아직은 순항 중’

“외고에도 묵시적 차별 존재

‘이너서클’ 못 들까 불안감”


정재원씨(26·가명)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유명 외국어고를 졸업한 뒤 이른바 ‘SKY’ 중 한 대학의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같은 대학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자신의 이력이 나열된 서류를 바라보던 정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만 보면 사람들이 저도 전형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겠네요.”

정씨 가정은 중산층의 끝자락쯤에 있다. 친척집에서 월세살이를 할 때 태어나 ‘강남 태생’이 됐지만 인생 대부분은 강북에서 보냈다. 종합학원 외고준비반에서 입시준비를 시작했다.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것으로 유명한 소위 ‘명문고’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3년은 “상처의 시간”이었다. 교사와 학부모 간 금품수수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묵시적이고 포괄적인 차별대우가 교실에 만연했다. 정씨는 외고에서도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교사들은 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부모의 경제적 지원은 부족함이 없었다. ‘명문고’ 기준으로 보면 “한없이” 부족했다. ‘SKY 교수’ 자녀는 드물지 않았다.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임원급 자녀도 많았다. 아이들은 부모의 연수원 기수를 묻곤 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신용카드를 건네며 유력인사 자제에게 “밥을 사주라”고 했다.

부모들의 인적 네트워크는 곧 자식들의 ‘능력’이 됐다. ‘스펙 품앗이’는 예사였다. 부모들이 직접 영어토론대회를 개최하고 그 부모의 자녀들이 참가했다. 가장 못한 팀도 동상을 받았다. 수상 실적은 생활기록부에 올랐다. 이런 대회의 존재는 대치동 일부 커뮤니티에서만 공유됐다. 정씨가 이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량화된 시험’이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정량 평가인 행정고시나 법전원 진학 등을 염두에 뒀다.

그는 불안하다. 불안감은 근원적이다. “제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거든요.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는 ‘이너서클’에서 벗어나게 됐다거나, 애초부터 그 집단에 속한 적도 없다는 불안감도 있었고요.”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 의혹을 보며 화가 났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논문 저자로 이름을 올린 건 그가 다녔던 학교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교육자의 양심이나 학자의 연구윤리를 저버려야 가능한 일”이라고 정씨는 말한다.

“아버지 재산이 500억, 1000억원씩 되는 친구들도 박탈감을 느꼈어요. ‘SKY 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돈만 많지 아무것도 안 해줬다’ 이런 심리죠.” 정씨와 친구들의 분노는 특권층의 내부 경쟁일 수 있다.

정씨도 정시가 공정한 제도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다만 누구나 동의하는 100% 공정한 제도는 없다고 했다. “내 자식이 서울대 가면 공정한 제도고, 못 가면 공정하지 않은 제도잖아요.”

삶에 만족할까. 그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운 좋게’ 탈선하지 않고 순항 중”이라고 했다.

부 세습 문제를 두곤 이렇게 말했다. “경제적 자본으로 학벌 같은 사회적 자본까지 세습하는 건 공익에 반하지 않나 싶어요. 실력 없는 사람이 부모 재력으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자격 있는 사람은 연구할 기회를 잃는 것. 이게 진짜 문제라고 생각해요.”

경향신문

지방대 토목공학과를 나와 수도권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김하인씨(가명)가 자신의 스펙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거울에 비춰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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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생 김하인씨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넘을 수 없었던 취업 장벽’

대외활동으로 6번 상 받고

취득한 자격증 10개 넘는데

서류 합격은 10곳 중 2곳뿐


김하인씨(27·가명)는 고등학교 내내 교사를 꿈꿨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교대나 사범대 과학교육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수능을 망쳤다. 2010년 당시 사범대는 인기가 높았다. 김씨는 성적에 맞춰 충청도의 한 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교 1학년 첫 학기 시험을 보고 자신감이 붙었다. 석차 4등이었다. 열심히 하면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은 미래를 고민하지 않았다. 동기 50명 중 1~2명 정도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 노력했다. 대부분 놀기 바빴다. 선배들은 “토목공학과는 비전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겠구나. 나는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학년 1학기 때부터 대외활동을 했다. 대한토목학회 주최 UCC 경연대회 동상, 토목의날 구조물경진대회 장려상, 서울·경기권 토목공학과 학생지회 주최 아이디어 경진대회 동상 등 졸업할 때까지 6차례 상을 받았다.

3학년 2학기 때부터 취업준비에 뛰어들었다. 방학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격증 학원을 다녔다. 주차장, 고물상, 식당 홀서빙 일을 했다. 금·토요일에는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도 나갔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다. 일이 끝나면 오후 10시까지 학원에서 공부했다. 방학 두 달 남짓 동안 김씨는 300여만원을 벌었다. 그 돈을 학원비로 내고 생활비로 썼다. 김씨가 이력서에 적은 자격증은 토목기사, 산업안전기사 등 10개가 넘었다. 동기 중에는 토목기사, 영어 자격증만 취득한 사람이 많았다.

학교에선 취업정보를 얻지 못했다. 교수들은 실질적으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취업박람회도, 취업준비 프로그램도 없었다. 서울권 학교에 흔한 취업특강도 없었다. 정보를 구할 수 없는 구조였다.

5분의 1. 김씨의 서류 합격률이다. 4학년 1학기 때부터 현대·두산·SK건설 등 대기업과 한국수자원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기업 10곳에 지원했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 회사는 2곳이었다. “착잡했죠. 당연한 결과라고도 생각했어요. 학교가 워낙 안 좋으니까요. 서울권 학생들도 제가 한 걸 다 했을 텐데 밀릴 수밖에 없죠.”

면접서 대학교 지적 받으며

“어차피 안되겠구나” 좌절

취업 포기하고 대학원 진학


면접 과정에서 대학교를 지적하는 말을 들었다. 면접관들은 김씨에게 “준비는 잘했는데 대학교가…”라고 했다. 다른 지원자에겐 묻지 않았다. 김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때 ‘나만 지방대 출신이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안될 거 끝까지 앉아 있으면 무슨 소용 있나’ 싶어 오후 면접도 포기하고 나가고 싶었죠.” 결과는 2곳 모두 불합격. 지도교수는 타교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추천했다. 김씨는 수도권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지방대생 중에는 취업이 안돼 어쩔 수 없이 대학원에 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대학원으로 학벌을 높여보려는 거죠.”

김씨는 한국 사회에서 학벌을 ‘줄타기’라고 생각한다. 학벌 같은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기회의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본다. 매년 대학원 행사에 각 기업의 자교 출신 선배들이 참석한다. 이들은 ‘우리 회사에 우리 학교 출신이 몇 명 있다. 많이들 지원하라’고 한다. 김씨는 자신이 나온 지방대 환경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지방대에는 취업특강도, 대기업에 취직한 선배들도 없다. “지방대 출신 사람들이 대기업에 취업하기 힘든 이유죠.”

김씨는 한국 사회에 개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문재인 정부가 공정을 강조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건 없다고 본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수십 군데 서류를 넣잖아요. 제가 10곳만 넣고 그만둔 건 면접에서 대학교 이야기를 듣고 제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에요. 딱 선이 느껴졌어요. 난 그 선 위로 못 올라가는구나. 이렇게까지 준비했는데 선을 넘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죠.” 김씨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사업을 하겠다’는 새로운 꿈을 꾼다.

경향신문

■ 지역농협 사원 강용훈씨 ‘있는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해외 유학 한 번 갔을 텐데’

입시서 체감 못한 영어 격차

대학 진학 후 또렷이 다가와

영어 좀 하는 친구들을 보면

“잘사는 집이구나” 자격지심


강용훈씨(28·가명)는 충북의 한 지역농협 사원이다. 대전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외국의 같은 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으나 포기했다. 해마다 수천만원을 쓸 여유가 없었다. 지역농협에선 2년차 사원인데도 연봉이 낮지 않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Work and Life Balance 준말)’도 좋다. 다만 기회가 되면 공부를 더 하고 싶다. 유학은 강씨에게 ‘가지 않은 길’로 남았다.

가난하진 않았다. 대학 때 공사장 노동이나 교내 근로장학생 활동은 경험 삼아 한 것이다. 유학은 달랐다. ‘있는 집 자식’이 주로 유학길에 올랐다. ‘없는 집 자식’으로서 유학간 친구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학금을 받는 사람은 소수였고 강씨는 그 안에 들 자신이 없었다.

강씨는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있는 집’과 ‘없는 집’ 격차를 느끼지 못했다. 교사들도 수시나 입학사정관제 같은 제도를 잘 몰랐다. 입시는 곧 정시였다. 대외활동란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도 느껴본 적이 없다. 대학에 가고 나서야 정시 외 방법으로 입시를 치른 친구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친구들은 대체로 서울 출신이거나, 지방에서 외고 같은 특목고를 나왔다. 어릴 때 외국에서 공부한 친구도 적지 않았다.

대학 진학 후 ‘격차’가 뚜렷하게 다가왔다. 영어 능력 차가 심했다. 학과 특성상 대부분의 수업이 영어로 진행됐는데, 강씨를 비롯한 일반고 출신은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말하기나 쓰기가 많이 힘들었다. 똑같은 답안이라도 영어로 쓰지 않으면 낮은 점수가 나왔다. 1학년 때부터 학점이 갈렸다.

격차는 점수 이외 영역에서도 드러났다. 영어 능력자들은 국제행사 통역 기회를 얻었다. 남들이 갖지 못하는 특출한 스펙을 손에 쥔 것이다. 이들은 빠른 취업을 원하지도 않았다. 더 나은, 더 마음에 드는 직장에 붙을 때까지 용돈을 받으며 버텼다. 유학이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았다. 강씨는 “영어 좀 하는 친구들을 보면 ‘쟤네 집은 좀 살겠구나’ 하는 자격지심이 들었다”고 했다.

강씨도 노력했다. 스마트폰 앱으로 수업을 녹음했다. 집에 가서 두번, 세번 들으며 복기했다. 방학 때는 지방국립대에서 연 토킹클래스(영어 말하기 수업) 등에 참여했다. 그래도 몇 번 F학점을 받았다. 점차 외국인 교수 강의는 등록조차 하지 않게 됐다. 강씨는 “집에 돈이 좀 있어서, 중학교 때 1~2년 정도 유학을 갔다 왔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크게 불공평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래도 한국에서 대학생활 하고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면서 “종일 알바하느라 학과 공부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정말 여건이 어려운 친구들도 있다”고 했다. 그는 “약학·법학 전문대학원이 생긴 것도 결국 사회 고위층이 부를 대물림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싶다”고 했다.

허진무, 김희진, 심윤지, 탁지영, 조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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