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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모두 제잘못"→"합의에 의한 관계"···본인 말에 당한 안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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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 막바지 열린 안희정 신문

재판부 “피고인 진술 믿기 어렵다”

피해자는 일관된 진술, 유죄 결론

중앙일보

비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1월 4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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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에 의한 성관계란 것이 제가 갖고 있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비서실이 당장 반박성명을 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로 올린 것입니다.”

지난 1월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54)가 처음으로 법정에서 입을 열었습니다. 1심 무죄 판결 이후 항소심 막바지에 열린 피고인 신문 때입니다. 이날 안 전 지사는 비서 김모(35)씨가 JTBC뉴스룸에서 성폭행 피해를 봤다고 폭로한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썼던 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당시 그는 페이스북에 김씨에게 사과를 전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취지의 글을 남겼습니다. 이후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성폭행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불륜과 간음 사실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고 자신이 쓴 페이스북 글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다시 이날 법정에서 또 말을 바꾼겁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진술에 모순점이 없는지 세밀히 살폈습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진술 중 ▶페이스북 글에 대해 검찰과 법정에서 서로 다른 진술을 한 점 ▶검찰 조사에서 김씨와 ‘연인관계’였다고 주장했다가 법정에서 이를 번복한 점 ▶연인관계였다고 주장했음에도 언제 어떤 경위로 이성적 감정을 느꼈는지, 사적 감정표현을 한 예가 있는지 등 자신의 진술과 다른 물증이 모순되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항소심의 지적은 김씨의 일관된 진술 신빙성과 더해져 안 전 지사의 유죄를 뒷받침하는 간접 정황이 됐습니다. 재판부는 2018년 확립된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성폭력 사건에서 피고인 진술의 모순점은 공소 사실을 뒷받침하는 간접 정황이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따랐습니다.

실제 이날 열린 피고인 신문은 안 전 지사에게 ‘독’이 됐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한 변호사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재판부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안 전 지사가 합리적으로 대답하지 못한 것 같다”고 그때 상황을 기억했습니다.

안 전 지사의 판결 이후 ‘성인지감수성’이란 용어가 실시간 검색어 오르는 등 마치 성인지감수성만으로 안 전 지사의 유죄가 인정된 것처럼 크게 이슈가 됐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관계자는 “무죄와 유죄로 극명하게 나뉘었던 1·2심이 모두 성인지 감수성 법리를 차용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단순히 성인지감수성 판례가 아니라 안 전 지사 스스로 말을 번복한 점 등도 안 전 지사의 유죄를 인정하는 주요 판례가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법정에서 스스로 바꾼 말이 그의 발목을 잡은 셈입니다.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은 파기됐지만, 그 내용 중 일부는 우리 사회에 시사점을 주는 부분도 있습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 끝부분에 “피해자의 심리상태에 관한 몇 가지 가정적인 판단”이라는 부분을 적어두었습니다. 이 부분에는 ‘그루밍’ ‘학습된 무기력’ ‘해리’ ‘긴장성 부동화’ 같은 개념이 등장합니다. 모두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을 수 있는 심리 상태에 관해 설명하는 정신심리학적 용어들입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법률상 용어는 아니기 때문에 판결문에 꼭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당사자들이 변론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사회적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설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추측했습니다. 물론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김씨가 안 전 지사의 성폭력에 강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이 그루밍(길들이기)에도, 학습된 무기력(어떻게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피해자 측 서혜진 변호사는 “재판부가 김씨의 심리상태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안 전 지사측 주장을 받아들인 점은 동의할 수 없지만 이런 부분이 판결문에 실린 것은 이례적이다”고 말했습니다. 법원이 성폭력 피해자들의 심리상태와 그들이 놓인 상황의 맥락을 파악할 때 법률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 심리학적인 방법 등 다각도로 심리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겁니다.

지난 9일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안 전 지사는 이제 안양교도소에서 3년 6월의 남은 형기를 보냅니다. 현직 도지사에 대한 미투 운동 사건은 그의 수형 생활로 마무리된 것일까요. 이 사건 초기부터 함께해온 배복주 공동대표(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는 “이제 시작이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배 대표는 “안 지사 사건 이후 ‘나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나도 김씨처럼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고 전화로 상담을 요청해오는 여성들이 정말 많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이번 사건이 단순히 김씨에게 성폭력을 휘두른 안 전 지사에 대한 처벌로 기억돼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배 대표는 “상하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해외에서는 업무상 위력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며 “우리나라만 두고 보더라도 장애인·미성년자가 아닌 성인 여성에게 위력에 의한 성범죄가 인정되는 경우는 업무상 위력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수많은 여성이 잘리지 않기 위해 직장 내 권력관계에서 오는 부당함을 감수해왔다는 취지입니다. 배 대표는 “안희정 판결은 직장 내에서 갑질이나 불이익, 성폭력 등을 겪었을 때 ‘이렇게 말해도 되는구나’ ‘이건 부당한 거구나’ 처럼 일반 여성들에게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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