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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⑪왁자지껄 수다 속 쌓여가는 접시마다 추억도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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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타파스 바

경향신문

스페인에 가면 타파스 바 순례를 해보자. 작은 접시에 담아낸 음식엔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가 그대로 녹아 있다. 떠들썩한 식당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려 유쾌한 추억을 쌓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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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치즈부터 튀김까지

작은 접시에 내놓는 ‘타파스’

초파리 막으려 술잔 덮던 풍습

메뉴판 대신 제공한 샘플 음식

다양한 유래에 역사·문화 담겨

전통시장서 부담 없이 푸짐하게

가장 유명한 곳은 ‘바 피노초’

현지인과 어깨 부딪치며 먹거나

‘티케츠’ ‘텐즈’ 같이 고급진 바에서

개성만점 미식을 즐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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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네타 지역 식당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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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버킷 리스트에 ‘현지 체험’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현지인들만의 삶의 방식 들여다보기, 그들과 어울리기, 그리고 현지인처럼 살아보기 등등. 하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도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부족해서, 외국어가 짧아서, 용기가 없어서가 주된 이유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스페인으로 떠나기 바란다. 다양한 타파스 바(tapas bar)를 다니다보면 현지 음식문화 체험은 물론 역사까지 만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 작은 접시에 담긴 역사

단수형으로 ‘타파(tapa)’, 복수형으로 타파스(tapas)는 어떤 종류의 스페인 음식이든지 소량만 담아 내놓는 전채 혹은 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올리브와 치즈 같은 차가운 음식부터 꼴뚜기 튀김이나 삶은 문어 같은 뜨거운 음식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왜 음식을 이렇게 작은 접시에 담아 낼까? 기원설은 다양하다. 그중에는 타파가 ‘타파르(tapar)’, 즉 ‘덮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술잔을 덮는 풍습과 연결시킨 이야기가 많다. 초파리로부터 달콤한 셰리주를 지키기 위해 빵조각으로 덮었다는 것이다. 셰리주를 햄으로 덮으면 갈증을 유발시켜 주류 매상이 오르기 때문에 레스토랑 주인들이 다양한 스낵으로 만들어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19세기 초반에 여행자들에게 방과 음식을 제공하던 여인숙에서 제공한 샘플 음식이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문맹인 여행자들이 많아서 음식을 담은 접시들이 메뉴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기원설은 15세기 후반 스페인 국토회복운동과 종교재판 시기에 남부 안달루시아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정체성을 내보이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설이다. 타파스에는 햄을 비롯해 코셔(Kosher·<구약성서>의 레위기 등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는 정결한 음식) 식재료가 아닌 것이 많기 때문에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는 상징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설들을 알게 되면 조그만 접시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매력적인 관광요소임을 깨닫게 된다.

■ 현지인처럼 먹고 마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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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와인을 쓴 타파스24의 상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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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타파스로 유명한 곳은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과 북부 바스크 지방이다. 하지만 작정하고 타파스 여행을 떠난다면 바르셀로나가 더 흥미로울 것이다. 가장 오래되고 서민적인 방식부터 가장 창의적이고 고급스러운 방식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타파스 문화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스페인에서 서민들이 가는 일반적인 타파스 바의 모습은 이렇다. 천장에는 돼지 다리 수십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바에는 다양한 음식이 담긴 조그만 그릇, 즉 타파스가 수십개 널려 있다. 바를 둘러싼 사람들은 서서 술을 마시며 큰 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끼어들어 술 한 잔 주문하면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며 쉽게 친해지게 된다. 그 안주 이름이 뭐죠? 맛있어요? 저도 이거 하나 주세요. 맛있네요! 정도의 간단한 대화만으로도 현지인들과 교감이 시작된다.

아침이라면 뻔한 호텔 조식을 건너뛰고 람블라스 거리 초입에 위치한 보케리아 시장으로 직행하면 좋다. 람블라스 거리는 바르셀로나의 명동 혹은 홍대입구라고 할 만한 관광 중심지인데, 흥미롭게도 이런 길 초입에 전통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온갖 식재료를 파는 상점들 사이에 타파스 바도 끼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 피노초(Bar Pinotxo)다. 시장답게 새벽 4시부터 열고 오후 5시면 닫는데, 아침 일찍 가야 줄을 서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 상인들, 일하러 가는 현지인들과 어깨를 맞대고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스페인의 카페라테)를 마시며 아침을 먹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거의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곳의 주인 후아니토는 무려 50년이 넘게 같은 자리에서 일해왔다. 그의 어머니가 새벽 4시부터 이 가게를 열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곳은 수십년간 내려온 카탈루냐 지방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들을 내놓는다. 화려한 장식 없이 전통적인 맛을 지키는데, 가장 유명한 메뉴는 병아리콩에 꼴뚜기 혹은 모르시야(피순대)를 곁들인 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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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삼파녜의 다양한 요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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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고딕 지구를 구경하고 난 후의 코스로는 엘 삼파녜(El Xampanyet)를 추천한다. 주말 밤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현지인으로 꽉꽉 들어차서 외국인들은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서 카바(cava·스페인의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을 주문하면 말로만 듣던 스페인의 정열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다.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소리소리 내지르며 떠드는데, 그 분위기는 문화 충격이라 할 만하다. 점심 때는 근처 바르셀로네타 해변 근처의 라 코바 푸마다(La Cova Fumada)를 권한다. 간판도 없이 허름하고 오래된 백반집에 동네 사람 수십명이 들어차 있는 맛집이다. 봄바(으깬 감자볼에 매콤한 소스를 얹은 것), 문어, 토마토 소스로 요리한 대구, 아티초크 구이, 모르시야, 토마토 바른 빵 등 모든 메뉴가 맛있는데 가격은 각각 1~3유로 정도다. 혼자서 이렇게 많이 먹은 것은 옆자리 할아버지가 너무나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사람처럼 두어 시간 동안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 점심을 먹는 문화를 체험해보고 싶다면 꼭 가보기 바란다. 근처의 라 봄베타(La Bombeta)도 비슷한 분위기인데 문어, 조개, 새우, 홍합, 오징어, 꼴뚜기 등을 튀기거나 구운 해산물 타파스의 모습이 흥미로울 것이다.

■ “타파는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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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스럽게 구운 꼴뚜기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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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즐겼다면 이제는 고급 타파스 문화를 체험할 차례다. 바르셀로나에는 일반적인 타파스 바보다 한 차원 높은 고급 요리를 내면서도 친근하고 쾌활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타파스 바들이 많다. 그중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은 타파스24. 스페인 최고급 레스토랑 엘불리(El Bulli)의 수석 셰프 출신으로, 한때 코메르스24라는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카를레스 아베얀이 운영하는 세컨드 레스토랑이다. 이곳만의 유머 감각이 묻어나는 대표 메뉴인 비키니 샌드위치에는 무려 송로버섯과 고급 하몬, 모차렐라 치즈가 들어간다. 상그리아에는 또 얼마나 좋은 와인과 과일을 썼는지, 한 번 마셔보면 길거리 식당의 싸구려 재료로 만든 상그리아를 다시는 마시기 싫어질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갈 때마다 여러 차례 들르며 모든 메뉴를 다 먹어보았는데, 분위기도 좋고 대부분의 요리가 맛있다. 꼴뚜기, 문어, 세비체, 감자튀김, 콩과 송로버섯을 곁들인 생선 튀김, 레몬 속을 파내고 그 위에 생크림을 얹고 민트 잎을 함께 낸 디저트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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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타파스 바 티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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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타파스 바 중 가장 유명한 곳은 티케츠(Tickets)다. 미쉐린 1스타,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32위, 그리고 스페인의 미쉐린 가이드북이라 할 수 있는 렙솔 가이드북(Guia Repsol)에서 최고 등급인 3솔까지 받았다. 이곳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엘불리를 이끌었던 페란 아드리아의 동생 알버트 아드리아가 이곳을 이끈다는 데에 있다. 작은 바와 오픈 키친이 섞인 공간에서 아몬드 페이스트 안에 든 오징어 먹물, 구운 수박, 바삭한 문어와 김치 마요네즈 등을 맛보다 보면 최첨단 ‘리빙 라 비다 타파(Living La Vida Tapa)’, 즉 타파스 인생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왕 바르셀로나에 갔다면 현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엘 바리(El Barri) 구역의 타파스 바들을 돌아다니며 한두 접시씩 먹고 마시길 바란다. 모던 멕시칸에서 일본식 페루 음식까지, 개성 만점의 식당 다섯 개가 한 거리에서 운영되는 알버트 아드리아의 ‘요리 놀이공원’ 같은 곳이니까. 단, 엘불리 스타일의 타파스를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드니 예약은 필수다.

몇 년 전부터 미쉐린 3스타 아박(ABAC) 레스토랑에서 만든 텐즈(Ten’s)도 고급 타파스 바 대열에 합류했다. 스타 셰프 조르디 크루즈가 전통 스페인 타파스를 활용한 창조적인 타파스를 제공한다. 역시 미쉐린 가이드북에도 소개되었다. 이곳의 가장 큰 차별점은 타파스로만 이루어진 테이스팅 메뉴가 있다는 점이다. 10코스에 커피 등 3가지 음료와 프티푸르가 나오는 ‘라지 톱 텐즈(Large Top Ten’s)’ 테이스팅 메뉴는 1인당 62유로.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보다 가성비도 좋고 더 흥미로운 체험이 될 것 같다. 그 외에 엘 나시오날(El Nacional)도 가볼 만하다. 1889년까지 전시관이었던 대형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는데, 고급 타파스 바들로 채워진 푸드코트의 위용에 압도될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자타 공인 세계적인 미식 도시다. 해산물과 농산물 등 카탈루냐의 풍부한 식재료와 전통요리를 바탕으로 셰프들이 창의성을 발휘해 대담하고 도전적인 요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술잔 덮개 혹은 간단한 술안주에 불과하던 타파스를 세계적인 음식문화 반열로 끌어올린 것도 글로벌 미식 도시의 한 풍경일 것이다. 그렇다면 카탈루냐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한국의 여러 도시들도 이런 새로운 시도들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필자 이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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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업일치를 꿈꾸는 관광인류학자. KBS 여행 전문 팟캐스트 <여행상상> 진행자. 여행작가·해외여행인솔자로 70여개국을 다니며 미식, 스쿠버다이빙, 자전거, 요가, 순례 등 다양한 테마여행을 탐구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인의 해외관광문화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이민영 |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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