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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흉노 군주는 왜 한나라 황후에게 '성희롱 편지'를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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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발굴팀이 2012년 몽골 골모드에서 발굴한 동복(구리솥). 흉노인들은 이 청동솥을 가지고 다니면서 요리를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약 2200년 전 중국 중원을 공포로 몰아붙인 종족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진시황 이후 어지러워진 중국대륙에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즉 산을 뽑을 만한 힘과 세상을 덮을 만한 기세를 자랑했던 항우마저 제압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은 한나라 개국시조 고조 유방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차지한 한나라를 우습게 본 종족이 흉노족이었다. 몇가지 일화가 있다.



■에피소드 ①“잔말 말고 조공품이나 보내라”

언젠가 한나라 사신이 흉노의 풍습을 ‘오랑캐가 아니냐’면서 비아냥댄 일이 있었다.

“흉노에서는 노인을 천대한다지요? 또 아비와 아들이 같은 천막에 살며,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계모를 아내로 하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과 동생이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한다지요? 조정에 예절도 없다지요?”

그런데 흉노 조정에는 중국의 연나라 땅 환관 출신으로 망명한 중항열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중국역사는 이 중항열을 중국 최초의 한간(漢奸·적국과 밀통한 매국노)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흉노 입장에서 중항열은 천군만마의 충신이었다. 중항열은 흉노의 선우(임금)에게 “한나라의 풍습을 좇으면 반드시 중국에 동화되고 만다”면서 “절대 따르지 마라”고 신신당부한다. 중항열은 흉노의 신하들에게 계산법을 가르쳐 인구와 가축을 헤아려 기록하도록 했다. 흉노는 망명객인 중항열 덕분에 더욱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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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모드 출토 한나라제 칠기. 바닥에 주인 이름을 표기한 기호가 새겨져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런데 흉노를 방문한 한나라 사신이 ‘오랑캐 풍습’ 운운하자 중항열은 무척 빈정이 상했다.

“그 무슨 얘기인가. 흉노는 알다시피 전투를 큰 일로 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건장한 이들을 우대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으니까. 또 뭐라고? 부자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흉노의 예절이 어지럽지만 종족만은 지킨다.”

중항열은 ‘남의 나라(흉노) 걱정말고 너희 한나라 걱정이나 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쏘아붙인다.

“중국은 겉치레가 심하다. 충성이나 믿음없이 예의를 강요하기 때문에 위아래가 원한으로 맺혀있기 일쑤다. 궁실의 아름다움만 좇기에 헛된 노력들을 쏟는다. 겉만 화려하고 실속도 없는데 무슨 말라 비틀어진 예의냐.”

중항열은 한나라 사신이 이런저런 토를 달 때마다 쐐기를 박는다.

“사신은 듣거라. 너희 한나라는 해마다 보내기로 한 비단, 무명, 쌀, 술을 차질없이 보내주기만 해라.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말고…. 만약 나쁜 물건을 보낸다면 각오하라.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기마병으로 농작물을 확 짓밟아 놓을테니….”(<사기> ‘흉노열전’)

한나라 사신은 이 협박에 오금이 저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에피소드 ②“함께 즐겨보자”고 보낸 흉노왕의 성희롱 편지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기원전 195년 한나라의 창업군주인 고조 유방이 죽고, 부인인 여태후가 정권을 틀어쥐자 흉노의 묵돌선우가 망측한 편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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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성지에서 발견된 고구려-옥저계 토기. 다양한 교류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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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도 홀로되었고…. 둘 다 즐거운 일도 없고…. 어떤가요. 있는 걸로 없는 것을 바꿔보심이….”

한마디로 “당신은 과부, 나는 홀아비이니 함께 만나 즐겨보자”는 성희롱 편지였다. 여태후는 남편(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여걸이었다. 남편이 죽자 아들(효혜제·기원전 195~188)을 대신해 사실상 황제 노릇을 했다. 희대의 역사가 사마천도 바로 이 점을 높이 사 역대 황제의 전기인 <사기> ‘본기’에 ‘여태후 본기’를 올려놓았다, 사마천은 여태후를 황제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그런 대접을 받을 만 했다.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또 백성들이 농삿일에 힘쓰니 의식이 나날이 풍족해졌다.”(<사기> ‘여태후 본기’)고 후한 점수를 주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여걸에게 흉노 임금인 묵돌 선우가 성희롱 편지를 보낸 것이다. ‘묵돌이 나에게 모욕감을 줬다’고 부들부들 떤 여태후는 지금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다.

몇몇 장수는 당장 흉노를 정벌해서 본때를 보여주자고 앙앙불락했다. 그러나 이 때 중랑장 계포가 나서 “전쟁 불사 운운하는 자들의 목을 쳐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흉노와의 전쟁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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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전성기 영역은 한나라를 능가하는 제국이었다. |출처:<지금은 사라진 고대 유목국가 이야기 흉노>, 사와다 이사오, 아이필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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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누구 때문에 망했습니까. 흉노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리고 고조(유방)께서도 40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평성의 치(恥)’를 당했는데 어떻게 흉노의 한복판을 짓밟는다는 말입니까.”

계포의 주장에 한나라 국가안전보장회는 ‘갑분싸’로 돌변한다. 여태후도 모욕감을 애써 감춘채 흉노 정벌의 꿈을 접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계포의 말이 옳았다. 당대 흉노는 진과 한나라를 능가하는 대국이었으니까…. 그렇게 능욕을 당해도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계포가 “진나라가 흉노 때문에 망했고, 창업군주인 고조가 40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평성의 치욕’을 당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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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로 이주한 뒤 사망한(864년) 신라인 김씨부인의 묘비명. 조상이 흉노인 김일제였음을 기록했다.


■에피소드 ③ 호(胡) 때문에 망한 진나라

흉노의 선조들은 외몽골에서 떠돌던 유목인들이었다. 그러다 기원전 7세기부터 재빨리 스키타이의 기마전법을 습득한다. 주변 종족들을 병합시키면서 정치세력을 결집시킨다.

“그들의 풍습은 평상시 목축에 종사하지만 긴급상황일 때는 전원이 무장기병이 되어 참전한다. 유리할 때는 진격하고 불리할 때는 퇴각한다. 도주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장정들이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인들은 남은 음식을 먹었다. (싸움을 위해) 건장한 사람을 우대하고, 노약자는 경시됐다,”(<사기> ‘흉노열전’)

흉노의 기마전법은 중원 북쪽의 나라인 진·조·연나라를 충격에 빠뜨린다. 세나라는 변방에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입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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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세기 흉노족 무덤에서 발굴된 사람 얼굴 모양의 은제 허리띠 장식.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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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시황제가 6국을 쳐서 천하를 통일했다.(기원전 221), 그러나 천하의 시황제라도 흉노는 두고두고 골칫거리였다. 어느날 시황제가 점을 쳤는데 “‘호(胡)’, 즉 흉노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점궤가 나왔다.

사실 점궤인 ‘호(胡)’는 시황제의 막내아들인 ‘호해(胡亥)’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진나라는 2세 황제인 호해 때문에 단 15년 만에 나라를 잃었으니까…. 그러나 시황제는 ‘호(胡)’를 흉노라고 믿었다.

시황제는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 정벌에 나섰다. 그런 뒤 만리장성 수축에도 나섰다. 하지만 장성 수축과 변방수비에 수십만명을 동원했다. 민심이 시황제를 떠났다. 결국 국경수비대로 끌려가던 진섭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천하는 다시 어지러워졌다. “진나라가 흉노정벌에 힘쓰는 바람에 나라가 망했다”는 계포의 언급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에피소드 ④ ‘평성의 굴욕’ 당한 한나라

한나라 유방이 항우와의 건곤일척에서 승리를 거두고 천하를 얻는다(기원전 202).

그러나 그 사이 북방의 흉노는 중원이 어지러운 틈을 타 강력한 힘을 키웠다. 아버지(두만 선우·?~기원전 209)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묵돌 선우(기원전 209~174)가 흉노를 강대국으로 키웠다. 이웃 종족인 동호를 정벌한 뒤 서쪽의 월지국을 취하고 남쪽의 누번왕, 백양하남왕 등의 영토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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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무덤 위쪽에 조성된 13~14세기 무덤에서 확인된 백화수피제 모자가 출토되고 있는 모습. 이 모자는 당시 여인들 사이에 유행된 아이템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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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 남은 라이벌은 막 천하를 통일한 중원의 한나라였다. 기원전 202년 겨울 한나라 고조는 개국공신인 한왕(韓王) 신(信)을 흉노와의 국경지역을 파견한다. 하지만 신은 흉노의 기습을 받고는 항복하고 만다(기원전 200). 묵돌 선우는 파죽지세로 남하한다. 역시 천하통일로 기세가 오른 한 고조는 40만 병력을 동원, 친정에 나선다. 하지만 맹추위와 눈보라에 한나라군의 20~30%가 동상에 걸린다. 여기에 묵돌 선우의 계략이 빛났다.

묵돌은 정예부대를 숨겨놓고는 약졸들을 내세워 한나라군을 계속 유인했다. 묵돌의 전략에 속은 한나라군은 무려 32만의 보병으로 추격전을 벌인다. 한 고조는 전군의 선두에 섰다. 한나라군이 평성(산시성 다둥시 동북쪽)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묵돌이 반격에 나섰다, 40만 정예기병을 동원, 고조가 이끄는 한나라군을 백등산 위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포위는 일주일간이나 계속됐다. 보급이 끊겨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 그때 기사회생의 묘책이 나왔다. 묵돌의 연지(閼氏·왕비)에게 밀사를 파견한 것이다. 후한 선물과 함께…. 밀사가 속삭였다.

“한나라엔 미인들이 많아요. 만일 당신 남편(묵돌)이 한나라를 정복한다면 아마 한나라 여자들에게 흠뻑 빠질 겁니다. 그럼 당신은 폐비가 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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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찾아낸 문무왕비석, “문무왕의 선조는 15대조가 성한왕(星漢王)인데. 투후(투<禾+宅>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 말에 위기감을 느낀 연지는 남편을 조르기 시작했다.

“두 나라 임금이 서로 괴롭히면 안돼요. 그리고 한나라 땅을 차지해도 거기서 살 수는 없잖아요?”

마음이 약해진 묵돌은 포위망 일부를 풀었고, 한고조는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가 ‘평성의 치’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엄청난 치욕은 그 다음이었다. 흉노의 계속되는 침략에 속수무책이던 한나라가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3가지 조항을 보면 굴욕 그 자체다.

“한나라 공주를 선우의 연지로 보내고, 해마다 일정량의 무명과 비단, 술, 쌀 등을 바치며, 형제의 맹약을 맺어 화친한다.”

천하의 한나라가 오랑캐인 흉노 왕에게 종실여인과 조공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형제의 연, 아니 사실상 동생이 되기를 약속한 것이다. 다만 자존심 때문에 차마 공주를 보낼 수는 없었다. 종실 여인을 공주라 하여 속여 보냈다. 당시 연나라 땅 출신 환관이던 중항열은 바로 이때 종실여인을 수행하라는 명을 받아 흉노로 떠난 인물이었다. 중항열은 흉노행을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한나라 조정이 강압적으로 파견하자 중항열은 ‘내가 만약 흉노로 간다면 한나라에게는 반드시 우환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중항열은 흉노에 도착하자마자 망명했고, 흉노를 강국으로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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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본 기련산.전성기를 구가하던 흉노는 한무제의 대대적인 반격에 북쪽으로 쫓겨갔다. 흉노인들은 기련산을 잃은 슬픔을 노래로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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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⑤“한나라 황제, 안녕하신가”

이후 흉노는 누란과 오손, 호계 등 26개 인접국까지 모조리 병합하면서 더욱 기세를 떨쳤다.

한나라는 이미 흉노의 적수가 아니었다. 묵돌의 뒤를 이은 노상계죽 선우(재위 기원전 174~160)때의 일이다.(기원전 162년) 한나라가 흉노에 보내는 국서는 1척1촌의 목간을 사용했다. 그런데 흉노는 1척2촌의 목간을 썼다. 도장과 봉투도 더 크게 했다. 목간에는 이렇게 썼다. 아주 거만하게….

“나는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天所立匈奴大單于)다. 천지가 생겨난 곳, 해와 달이 머무는 곳의 흉노 대선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가 삼가 한 황제에게 묻노니 안녕하신가? 그리고 보내줘야 할 물건은~용건은~”

흉노의 위상이 한나라보다 한 수 위라고 한 것이다. 이같은 도발에도 한나라는 꿈쩍도 못했다.

■에피소드 ⑥ “우리는 기련산을 잃었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욱일승천하던 흉노의 기세는 한나라 무제(기원전 141~87)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꺾이고 만다. 한나라는 기원전 115~73년 사이 무위, 장액, 주천, 돈황에 이르는 이른바 하서 4군을 획득한다. 흉노는 고비사막 북쪽으로 후퇴한다. <사기>의 주석서인 ‘색은(索隱)’에는 이때 흉노인들이 구슬피 불렀다는 민요를 소개했다.

“우리는 기련산을 잃었네. 이제 가축을 먹일 수 없네. 우리는 연지산을 잃었네.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 없네.(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失我燕支山 使我嫁婦無顔色)”

흉노가 요충지인 기련산(祁連山)과 연지산(燕支山·감숙성 하서주랑)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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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발굴한 흉노유물 금제허리띠. 흉노는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유목민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한나라를 압박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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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⑦훈족=흉노족?

이후 부침을 계속하던 흉노는 한나라의 공격과. 천재지변, 그리고 내분이 이어지면서 쇠퇴일로를 겪는다.

흉노의 서쪽 지방을 지배한 일축왕이 한나라에 투항(기원전 60년)한 뒤 동서로 분열된다. 기원후 48년에는 지금의 내몽골과 화북 일부에 사는 남흉노와 외몽골에서 패권을 잡은 북흉노로 나뉜다. 남흉노는 중국의 속국이 됐다. 북흉노는 기원후 151년 이후의 선비족의 추격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일각에서는 북흉노를 4~5세기 동유럽을 석권하고 로마제국 쇠망에 영향을 끼친 훈족과 결부시키고 있다. 훈족은 375년 발라미르의 지휘 아래 동유럽으로 침입했던 유목민이다. 이것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야기시켰고, 로마제국을 흔들었다. 볼가강과 판노니아 평원에서 발견되는 흉노식 유물들이 증거자료로 거론된다. 특히 삶고 끓이는 조리용기인 동복(구리로 만든 솥)은 대표적인 흉노식 유물이다.

■에피소드 ⑧신라 김씨의 조상은 흉노족인가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는 분이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이시다.”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시 궈자탄(郭家灘) 마을에서 흥미로운 비석 하나가 발굴됐다. 864년 5월29일 향년 32살로 사망한 당나라 거주 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의 묘지명이었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인 김일제가 흉노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여 (중략) 투정후(제후)의 관작을 받았다. 이후 김일제의 후손이 가문을 빛내다가 7대를 지나 한나라가 쇠망함을 보이자 곡식을 싸들고 피란해서 멀리까지 이르렀다.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묘지명이라면 당대의 생생한 기록인데, 뜬금없는 자료는 아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비문에도 ‘흉노’의 흔적이 남아있다. 1769년과 2009년에 조각편들이 발견된 이 비문의 내용은 “문무왕의 선조는 15대조가 성한왕(星漢王)인데. 투후(투<禾+宅>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비석이 깨진 상태여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투후 제천지윤’ 명문이 심상치 않다.

이 ‘투후 제천지윤’이 바로 <한서(漢書)> ‘열전’에 나오는 김일제를 뜻하기 때문이다. 김일제가 누구인가.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한무제 때 한나라에 투항했다(기원전 102). 한무제는 휴도왕을 ‘금인(金人)의 제천주’로 대접하고 일제에게 김씨성을 하사했다. 일제의 어머니도 함께 왔는데, 그 여자 이름이 알씨(閼氏·연지)였다.

그런데 문무왕릉비와 재당 김씨부인 묘비문을 비교해보자. 문무왕릉비에 나오는 ‘투후’는 재당 김씨부인묘의 ‘투정후’를 연상시킨다. 한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9세기대 재당신라인인 김씨부인은 왜 김일제를 조상으로 여겼을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기원전 20년 중국 진나라의 난리를 피해 동래한 무리들이 많았고 이들이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는 <삼국사기> ‘본기·박혁거세조’ 기록과 연관되어 있을까. 물론 섣부른 단정은 금물이다.

■에피소드 ⑨사람얼굴 모양의 허리띠장식 발굴

최근 몽골 연구기관과의 협약으로 흉노 유적을 발굴중인 국립중앙박물관 조사팀이 사람 얼굴모양의 은제 허리띠 장식을 찾아냈다. 몽골 헨티 아이막 도르딕 나르스 유적의 흉노 무덤 200여기 중 가장 큰 제160호 무덤과 그 무덤에 딸린 배장묘를 조사한 결과라 한다. 은제 허리띠 장식의 경우 비슷한 형태를 한 2점이 피장자 허리 부분에서 출토됐다. 이런 형태 유물은 러시아내 몽골자치공화국인 부랴트 공화국의 차람 고분군 등 몽골 동북부 지역 흉노 무덤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 유물의 연대는 기원후 1세기 쯤으로 편년된다. 기원후 1세기 쯤이라면 욱일승천하며 한나라를 쥐락펴락했던 흉노가 한무제의 반격을 받고 북으로 쫓겨난 시기다. 중국 중원의 강대국 한나라를 쥐락펴락 하다가 쇠락한 흉노국의 빛바랜 영화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이 유물 사진을 바라보며 2000년전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고, 마침내 중국 중원까지 손아귀에 쥐었던 흉노의 역사를 공부해본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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