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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90년대로 역주행… 과거를 낙원으로 여기는 '레트로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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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韓 대중문화의 원형

아이돌 댄스그룹·팬덤의 등장… 곱창밴드·체크 셔츠의 유행…

'프렌즈'보고 핑클 노래 부르며 3040은 과거를 회상하고 1020은 패션 스타일에 감탄

- 미래 아닌 과거를 꿈꾸다

"불안정한 현재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레트로토피아의 원천"

"우리 수학여행 장기 자랑 때 다들 이정현 따라 췄는데, 지금 같이 추실 분?" "구피 형님들이 쓴 저 썬글(선글라스), 지금도 구할 수 있나요?" 유튜브의 '온라인 탑골공원'에서 1990년대를 풍미한 가수들의 당시 공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채팅창의 글들이 휙휙 넘어갔다. 이곳에선 1990년대에 10~20대를 보낸 30~40대는 과거를 회상하고, 1990년대 이후 태어난 10~20대는 당시의 패션 스타일에 감탄한다. 온라인 탑골공원은 SBS와 KBS가 각각 1990년대에 방영했던 가요 순위 프로그램 '인기가요'와 '가요톱10'을 유튜브에 스트리밍 하는 채널의 별명이다.

◇프렌즈 보며 핑클 노래 부르고

1990년대에 대한 열광은 대중문화 각 방면에서 이뤄지는 세계적인 추세다. 지난해 넷플릭스 시청률 2위를 기록한 콘텐츠는 신작이 아닌 1994년에 처음 방영한 미국 시트콤 '프렌즈'였다. 패션계에선 이미 서너 해 전부터 1990년대 열풍이 불었다. 1990년대 초를 풍미한 그런지 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즐겨 입은 체크 셔츠나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후프(크고 둥근) 귀걸이, 곱창밴드, 크롭티(배꼽티) 등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조선일보

①94년 첫 방영된 미국 드라마 '프렌즈'. ②90년대 유행했던 크롭톱을 입은 가수 제니. ③1994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벌새'는 개봉 6주 차에도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④90년대 말 방영된 'SBS 인기가요'를 그대로 틀어주는 유튜브 채널에서는 실시간 채팅이 함께 이뤄진다. /워너브러더스·인스타그램·앳나인필름·유튜브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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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 열풍은 단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재해석을 통해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 지난주 국내 독립·예술성 영화 1, 2위에 나란히 오른 '벌새'(감독 김보라)와 '미드 나인티스'(요나 힐)는 감독들이 10대 때 경험한 1990년대를 풀어내는 영화다. 1990년대 초 유행한 '뉴잭스윙'을 차용하는 가수 기린이 지난 8월 내놓은 신곡 '예이 예이 예이'의 뮤직비디오는 1990년대 TV 프로그램인 '사랑의 스튜디오'와 'TV는 사랑을 싣고'를 패러디했다.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원년

1990년대 대중문화가 다시 주목받는 건 그것이 현재 대중문화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7080' 세대가 포크나 로큰롤, 가난과 격동으로 향수를 자극했다면, X세대로 대표되는 1990년대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경제적 제약 없이 대중문화를 누리기 시작한 때다. 개성과 자유를 강조한 X세대가 이끈 대중문화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 '서태지와 아이들'(1992)과 'HOT'(1996)의 데뷔와 함께 아이돌 댄스그룹과 팬덤이 등장했다. 영화계에서도 '쉬리'(1998)를 시작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나타났고, 1995년 '키노'와 '씨네21'의 창간과 함께 예술 영화를 애호하는 '시네필'들이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방송계에서는 1992년 MBC에서 방영된 '질투'를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로 보고 있다. 이런 추세는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까지 이어지면서 정점을 이뤘다.

현재 대중문화의 원형을 1990년대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10~20대들도 쉽게 공감한다. 1990년대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한 '디지로그' 시대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PC통신과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유선 전화와 공중전화도 함께 활발히 사용하던 시기다.

◇과거는 정말 지상낙원이었을까?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가 현재보다 더 좋았다고 여기는 현상은 밀레니엄에 대한 흥분이 가신 후, 2010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0년말부터 '쎄시봉' 열풍을 시작으로 복고 유행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1990년대는 풍요롭고 행복하기만 했을까? 영화 '벌새'에서 1994년을 살아가는 10대 여학생은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걸 목격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이듬해에는 삼풍백화점이 붕괴했고,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1990년대는 1970~80년대의 고속성장이 가져온 부작용이 한꺼번에 드러난 시기였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작으로 남긴 '레트로토피아(Retrotopia)'가 바로 이런 현상을 다룬다.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retro)'와 지상낙원을 의미하는 '유토피아(utopia)'를 합쳐서 만들었다. 바우만은 "분통 터질 정도로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레트로토피아의 원천"이라고 했다. 유토피아는 미래 지향적 개념이지만, 현재는 불안정하고 미래는 꿈꿀 수 없으니 과거를 미래로 여기는 역행이 이뤄지는 것이다.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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