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6 (화)

“‘누군가 보고 있다’ 자각으로도 무용계 ‘미투’ 큰 성과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짬】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위드유’ 활동가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투’는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무용계에선 스승으로부터 상습적인 성추행이 있었다는 고발이 튀어나왔다. 일주일 만에 문화예술인 800여명이 피해자의 고발을 지지하는 연대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를 처음 작성한 이들은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이하 오롯)이다. ‘오롯’은 이후 ‘무용계 성폭력 반대 및 성평등 예술환경을 위한 연대 대책위’란 이름으로 내부에 ‘오롯#위드유’ 분과를 만들었다.

‘오롯#위드유’를 꾸려가는 김윤진, 박성혜, 천샘, 장혜진씨를 12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예술청에서 만났다.

이날은 ‘성폭력 반대 공연예술인의 날’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용계 미투 이후 성명서 발표, 재판 방청 등의 연대 활동을 해 온 ‘오롯#위드유’는 행사장 앞에서 제자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류아무개 무용단 대표의 처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받았다.

“처음 성명서를 낼 때 생각보다 뜨거운 지지를 얻었어요. 803명 개인, 84개의 단체가 이름을 걸고 올려주셨거든요. 무용계가 폐쇄적이어서 실명 공개에 부담이 많았을 텐데 워낙 성추행이 고질적으로 일어나는 점에 많은 분이 공감하고 연대해주신 거죠.”(천샘)

무용계 성폭력엔 특수성이 존재한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교육 과정에서 몸의 주권을 빼앗기게 된다”(장혜진)는 거다. 장씨는 “내 몸에 대한 판단을 오롯이 교육자에게만 맡기게 되는 교육환경인 데다 수치심이 교육의 도구로 활용된다”고 설명했다. “넌 왜 이렇게 뚱뚱하니” “넌 몸이 왜 그러니”같은 말이 교육의 촉매제로 이용된다는 얘기다. 이런 환경에선 원치 않는 신체 접촉으로 수치심을 느낀다고 해도, 그 수치심은 “더 좋은 무용수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치부된다.

“쉽게 말하면 내 몸이 다 도구화되는 거예요. 경연에서 입상해야 한다면 모든 수치심과 모욕을 다 참고 넘겨야 하는 거죠. 선생님이 물리적인 폭행을 하든, 언어로 희롱이나 모욕을 하든 이 모든 게 ‘나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학습돼요. 사제간 종속도 심하고요. 내 스승의 동료와 선후배들이 무용계 주요 권한을 지닌 자리에 있다 보니 학생으로선 선택지가 없어요. 성추행을 고발하면 ‘문제 일으키는 아이’로 찍히는 거죠.” (김윤진)

지난해 ‘미투’ 뒤 오롯에 대책위 꾸려
성명 발표나 재판 방청 등 지원 나서


“무용수에게 ‘신체 주권’ 돌려줘야
현대무용 ‘탈의 규약’ 마련 시급
‘진정성 있는 반성’ 선례 봤으면”


‘오롯#위드유’는 이처럼 고발자들이 오히려 낙인이 찍히고, 고립되고, 끝내 무용계에서 퇴출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뭉쳤다. ‘페미플로어’나 ‘약속하는 언니들’처럼 창작환경 개선을 위해 모인 다른 무용계 안의 단체들과 함께 자치규약도 만들어본다.

핵심은 몸에 대한 ‘신체 주권’을 무용수 자신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박씨는 “임신이나 생리도 일방적으로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출혈이 진행되는 데도 안무를 계속 해야 되는 상황도 있다”고 말했다.

“현대무용은 무대 위 탈의에 대한 규약이 시급해요. ‘선생님이 벗으라면 벗는 것’이란 얘기를 하거든요. 과연 저 작품에서 탈의가 정말 필요했는지, 그 동작을 정하는 과정이 민주적이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천샘)

이들의 활동은 공고한 카르텔을 지키고 싶어하는 무용계 안의 권력자들, 피해자와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만 축소하는 사람들,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에게 “굴하지 않겠다”는 신호이자 “더 이상의 성폭력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다. 국공립단체나 공공기관에서 성폭력 가해자를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관련 가이드라인을 점검하는 일도 할 계획이다.

박씨는 “우리 모두 가해자는 알지만 피해자는 얼굴도 모른다”며 “그럼에도 절대 그 친구를 혼자두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행동하면서 적어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자각이 무용계 안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요. 그것만도 큰 변화죠.”(박성혜)

이제 시작이다. 김씨는 “진흙 속에서 이제 막 발을 뗐다고 생각한다”며 “가해자가 진정성 있게 반성하고 자숙하는 선례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의 슬로건 중 하나는 “가해자는 다시 돌아온다”였다. 재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가해자가 다시 복귀할 때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무용 생태계를 만드는 것, ‘오롯#위드유’가 오늘도 움직이는 이유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동영상 뉴스 ‘영상+’]
[▶한겨레 정기구독] [▶[생방송] 한겨레 라이브]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