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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바보 같은 정책만 내놓는다” 중소기업 실태도 모르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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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어떤 정권에서도 중소기업 지원을 등한시한 경우는 없었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경제가 대기업을 중심으로 굴러간다 하더라도 중소기업은 단 한 번도 ‘9988’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은 매년 약간의 증감이 있을 뿐 전체 기업의 99%를 차지하고,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 역시 전체 기업 종사자 수의 88%를 차지해왔다. 중소기업이 무너지면 대다수 국민들의 생계가 무너지는 셈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인 제3~4공화국 당시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중소기업의 경영환경이 취약해진(엄밀히 말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량차가 대폭 커진) 7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져왔다.

중소기업 대표들 “기대할 것도 없다”

헌법 제123조 3항에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해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고, 1965년 제정된 중소기업기본법을 시작으로 중소기업을 다방면으로 지원하기 위해 제정된 각종 일반법 및 특별법이 19개에 달한다.

재정지원, 각종 기술지원, 인력지원책 역시 정권마다 공약으로 내세워왔고, 실제 많은 자금이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투입돼왔다.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전국경제인연합회보다 중소기업중앙회를 먼저 방문해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취임 초기부터 강조했다.

문재인 정권은 중소기업청을 중소벤처기업부로 승격, 중소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 및 지원책을 통합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지만 산업계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힘 없는 외청’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들 역시 “기대할 것도 없다”는 반응이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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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지난 4월 26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박용만 회장을 비롯한 기업인 및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 대한상공회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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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연구개발 지원 최종 수혜자는

“중소기업 지원자금 나도 받아봤습니다. 그래서 기업 운영이 나아졌냐고요? 내가 이 말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지원 안 받는다!’ 그냥 그 돈은 빚입니다. 은행 대출자금보다 금리가 절반 정도로 낮은 또 다른 대출입니다. 아주 일시적으로 숨통이 트였으니 그 정도 도움은 받았다고 하겠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살아남으려면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부로부터 중소기업 지원자금을 받았다고 하면 곧바로 원청에서 ‘시설 확충을 해라’, ‘불량률을 더 낮출 계획을 세워봐라’ 등의 지시가 내려옵니다. 그러면 거기에다 또다시 울며 겨자먹기로 투자해야 하고, 그러면 남는 돈이 없습니다. 기술R&D 연구비요? 우리 같은 업체에서 기술개발을 해봤자 반도체 같은 초정밀·고도기술이 아닌 이상 어차피 다른 데서 베끼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구조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면서 일시적으로 돈을 지원해줬으니 불만 갖지 말라고 하면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플라스틱 사출 1·2차 벤더 운영 중소기업 대표 ㄱ씨)

결국 ‘중소기업 지원자금’ 명목으로 거금의 예산을 투입해봤자 ‘언 발에 오줌 누기’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문제는 구조다. 국내 중소기업은 ‘강소기업’이라 불리는 소수의 중견 중소업체를 제외하고 대부분 ‘하청업체’ 형태로 운영된다. 제조업뿐만이 아니라 각종 유통부터 서비스까지 전 산업에서 중소기업은 ‘잡화상’처럼 모든 것을 다 운영하는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기능한다. 국내 중소기업의 약 65%가 대기업과 하청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1·2·3차 벤더). 때문에 중소기업을 지원해줘봤자 대기업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김종일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소기업정책의 방향과 과제’라는 글에서 “약자로서의 중소기업에 대한 보호와 지원은 중소기업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보다는 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대증적 처방”이라고 지적한다. 중소기업의 매출부진, 자금난, 인력난은 중소기업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며 중소기업 문제의 본질은 우리나라가 가진 구조적 불균형에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고도 강조한다.

김 교수는 글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중소기업에 연구·개발비를 몰아주면 그에 따른 혜택이 중소기업에 돌아가는가?’, ‘다수의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납품하는 현실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연구·개발 지원의 최종적인 수혜자는 누구일까?’.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의 혜택이 궁극적으로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저임 노동자에게 얼마만큼이나 돌아갈 수 있을까?’, ‘항상 구인난을 호소하지만 기업주는 이직의 주된 원인인 저임금을 해소하기보다는 설비자동화와 외국인력 충원을 선호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비현실적인 탁상행정에 대한 불만

현실에 대한 문제 파악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그런데 해결책이 없다. 문재인 정권 들어 역대 중소기업벤처부 장관들이 중소기업 실태와 대기업과의 불합리한 관행을 파악하기 위해 용역인력을 동원해 현장답사까지 나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돌아오는 해법은 ‘자금투입’, ‘인력투입’, ‘기술지원’이다. 중소기업 기술유출 피해방지법을 비롯한 각종 보호법 역시 역대 정권에서 법률명만 다를 뿐 비슷한 수준으로 발의했던 것들이다. 심지어 친재벌 정책을 펼쳤다고 비판받는 이명박 정권에서도 중소기업 보호 및 지원을 위한 각종 대책이 나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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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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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법으로 보호하고 제도로 지원하는 것 외에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막대한 정부 예산을 들여 지원금을 쏟아봤자 일시적인 자금순환에만 도움이 될 뿐이라면 장기적인 대책이라 볼 수 없다. 중소기업의 기술유출을 막을 강력한 제재법안을 마련해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은밀하게 이뤄지는, 예를 들어 대기업과 기술을 갖고 있는 하청업체 사이에 (대기업의 친인척이 운영하는) 1차 벤더가 끼어 기술을 대기업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을 경우 대기업에 직접적 책임을 물을 법적 근거가 없어 제재법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대기업 중심의 경제·산업구조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이미 제3공화국이 대기업 중심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펼친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는 정부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발주하는 하청 재하청을 통해 운영되는 중소기업의 구조를 갑자기 바꿀 수도 없다. 20년간 플라스틸 사출 및 금형제조업으로 대기업의 1차 벤더 역할을 해온 ㄴ씨(54)는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발주하는 물량을 받아 이익을 내왔다. 우리에게 대기업의 발주는 일종의 ‘산소마스크’와 같다”고 말했다. ㄴ씨는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살면 각종 부당대우를 당할 수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하청업체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중소기업도 많다”면서 “이 땅에서 하청이 아닌 독립적인 업체로 중소기업을 운영하라는 것은 너무 어려운 주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결국 매번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지적은 탁상행정에 대한 불만이다. 서류와 통계로만 중소기업을 바라보는 행정가들이 만든 정책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납품단가 후려치기다. 납품단가 후려치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불공정행위다. 그런데도 근절되지 않는다. 이유는 정부가 중소기업에 요구하는 것들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내부고발자들의 최후가 어떤지 아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내부고발을 하라는 식이다.

지방에서 금속부품 2차 벤더를 운영하는 ㄷ씨(53)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매년 피해사례를 서류로 제출하라고 하는데 도대체 거기다 ‘우리 후려치기 당했습니다’라고 써서 낼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며 “당장 주변에만 봐도 후려치기 당했다고 서류작업해서 냈다가 다음(분기)부터 원청으로부터 물량을 받지 못해 망한 회사가 몇 군데나 된다. 아예 처음부터 표준단가를 정부가 만들고, 직접 실제 단가를 확인해서 자기네들이 적발해야지, 왜 우리한테 신고를 하라고 하느냐. 신고하는 순간 소문나서 회사가 망한다”고 했다.

선박업체 부품 납품·제작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ㄹ씨(60)는 “공정위 직원들한테 ‘좀 나와서 직접 보세요’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죄다 서류만 보낸다”면서 “중소기업을 알아야 중소기업 정책을 만들지, 중소기업은 다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중소기업 위한다면서 실효성 없는 정책만 만든다”고 지적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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