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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끄럽고 불편한 일, 맡기세요” 퇴사, 이별도 10~20만 원이면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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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하라.’

껄끄러움, 민망함, 미안함, 귀찮음…. 이 같은 감정을 ‘스킵’(Skip) 할 수는 없을까. 불편한 감정을 감내하는 대신 돈을 지불하고 이를 타인에게 맡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감정 대행을 주문받은 업체들은 퇴사 등 전문절차부터 이별, 사과, 역할대행 등 업무를 세분화하며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대면 접촉과 감정소모에 피로감을 느끼는 세태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퇴사 대행 평균 10~20만 원에 해결 “껄끄러운 퇴사, 다 맡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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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던 노트북 퀵으로 보내요.”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모(40) 씨는 최근 택배 한 건을 전달받았다. 퇴사한 후배 A 씨가 보낸 노트북과 사무기기였다. “직장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던 A 씨는 사직서 발송부터 퇴직금, 실업급여 정산 등을 대행업체를 통해 진행 중이다. 황 씨는 “처음엔 사무실이 술렁일 정도로 모두 당황했지만 나름 고민이 많았을 A 씨 심정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최근 늘고 있는 퇴사대행의 절차는 대략 이렇다. 희망퇴직일을 정하면 퇴사플래너와 상담을 거쳐 사직서 등 문서를 작성한다. 대행업체는 고객 대신 사직의사를 전달하고 사직서와 반납할 물품을 발송한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퇴직금 정산, 근로소득원천징수 등 서류를 전달 받는다. 추가요청에 따라 사무실 짐을 대신 빼는 경우도 있다.

한 퇴사대행 서비스 이용자는 “상사 폭언과 과도한 업무지시로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조차 안됐다. 서비스를 이용해 회사를 찾거나 인사팀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잘 조율됐다”고 했다. 다른 이용자는 “회사 입장만을 강요해 퇴사일도 정하기 어려웠다. 서비스 이용 후 번거로운 일이 사라져 이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가격은 보통 10만~20만 원선이다. 회사 관계자와의 대면접촉 같은 추가 대행 업무가 필요하면 50만 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한 퇴사플래너는 “회사규모, 긴급성, 근로형태에 따라 비용 차이가 나며, 2030세대와 여성 직장인 이용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흰 봉투에 사직서를 넣어 직접 전달하는 기존 사표 제출공식도 변화 중이다. 사직서 발송만을 대행하는 ‘립(Leave) 서비스’ ‘출근길 사직서’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양식에 맞게 부서, 이름, 사유만 기입하면 PDF파일 사직서가 e메일로 발송된다. 제출 예정일도 설정할 수 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표방하며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작성한다”는 나름의 규칙도 적혀있다.

●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 이별·사과·질투심 유발도 대행 “택배 보내듯 감정도 대신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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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사과, 질투심 유발 등을 대행하는 서비스도 인기다. 이 업무만을 전문 수행하는 업체는 따로 없으나, 주로 역할대행 업체들이 맡는다. 과거 애인·하객 대행 등을 주로 수행했다면 최근 이별, 사과 통보 등 보다 감정적 영역의 일을 대행하는 게 특징이다.

의뢰인 대신 유선상으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지만 업체 직원들이 상대를 만나 부모, 친인척 역할을 하며 정중히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의 과도한 집착, 안전한 이별, 집안 반대 등이 주된 서비스 이용 사유다.

가격은 보통 10만~30만 원대. 요구사항에 따라 수백만 원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역할대행119 대표는 “대학생, 여성 이용객이 많다. 시기적으로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깔끔한 이별을 원하는 일이 많은데, 대면접촉을 꺼리고 이별과정에서 상대 반응이 두려운 이들이 저희를 찾는다”고 했다. 사과대행의 경우 과실 때문에 ‘진상’ 손님을 상대하기 힘들어 느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많다. 또 돈을 제때 갚지 못할 때 공손하고 정중하게 갚지 못하는 불가피한 이유와 사과를 전해달라고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역할극을 통해 연인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해달라는 요청도 꽤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대면접촉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회에서 대행 서비스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능력이 떨어진 현대인이 정신적 압박감, 상처로부터 탈피하고픈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서비스는 향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감정전달에 서툰 사회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정해주는 과외, 학원에 맞춰 살아온 젊은층은 앞으로도 대리인을 내세운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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