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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었더니 느낌 쿵!” 줄임말 세대, 긴 제목 노래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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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뮤, 장범준, 잔나비 등 밀레니얼 가수들 제목 긴 노래로 반향

‘제목 12자 이상’ 올 상반기 톱100에 7곡… 1~2년 전 1곡 ‘이례적 관심’

“줄임말로 이야기ㆍ감정 단절 반작용” “산울림 영향” 복고 유행도 한 몫

잔나비 노래 제목은 42자…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 K팝 아이돌그룹도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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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그렇게 길었어?” 2017년 9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인근에서 열린 썸데이페스티벌. 남매 듀오 악동뮤지션의 이수현(20)은 무대에서 부를 미발표곡 제목을 듣고 오빠인 이찬혁(23)에게 되물었다. 곡 제목과 가사를 쓴 이찬혁이 소개한 곡명이 너무 길어 깜짝 놀란 눈치였다. 악동뮤지션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 관계자에 따르면 이 곡은 당시 1절만 있던 미완성 노래였다. 곡을 부른 수현도 놀란 노래 제목은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로 글자수가 19자에 달했다. ‘응응’ ‘TT’ ‘음오아예’ 등 감탄사와 이모티콘 위주로 2~4자의 짧은 제목의 곡을 발표했던 또래 K팝 아이돌그룹과 비교하면 180도 다른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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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장범준은 신곡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을 발표하며 19자의 긴 제목을 썼다.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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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제목 12자 이상 잘리지만…

‘어떻게…’는 긴 글자수 탓에 음원 사이트에서 제목(음원사이트 멜론 기준 최대 12자)이 잘려 보인다. 디지털 환경에 맞지 않아 제목이 토막 나 보이는 곡은 지난달 25일 공개된 후 22일까지 28일째 멜론 등에서 1위를 지키고 있다. 줄임말에 익숙할 이찬혁은 왜 긴 제목을 썼을까. “그 문장 자체여야지 (곡이) 완성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곡 제목을 줄이고 싶지 않았고요.”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이찬혁이 들려준 얘기다.

‘짧은 곡, 긴 제목’이 요즘 대중음악계의 트렌드다. 곡은 3~5분 남짓인데 제목은 15자가 훌쩍 넘는 노래가 잇따라 발표되고, 주목을 받고 있다. ‘어떻게…’를 비롯해 가수 장범준(30)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까지. 20자에 육박하는 긴 제목의 곡들은 멜론에서 톱3(22일 기준)를 차지하며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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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밴드 잔나비의 노래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의 제목 글자수는 무려 42자다. 페포니뮤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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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음원 시장은 긴 제목 노래의 전성시대였다. 국내 주요 6개 음원 사이트의 음원 소비량을 집계하는 가온차트의 올 상반기(1~6월) 음원 톱100엔 제목이 12자 이상인 곡이 7개가 포함됐다. ‘이 노래가 클럽에서 나온다면’(우디ㆍ27),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백예린ㆍ22), ‘사월이 지나면 우리 헤어져요’(엑소 멤버 첸ㆍ27) 등이다. 대부분 20대 가수들이 낸 노래였다. 악동뮤지션의 ‘어떻게…’ 등을 포함하면 올 하반기까지 12자 이상 제목으로 인기를 얻어 톱100에 오를 곡은 10여 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2017년과 지난해 연간 톱100에 12자 이상의 노래가 각 1곡씩만 포함된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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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백예린은 올 상반기 노래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란 긴 제목의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 네이버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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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해 보여도 갬성 위해”

긴 제목의 노래 증가하는 만큼, 글자수도 부쩍 늘었다. 가온차트 올 상반기 톱100의 82위엔 록밴드 잔나비의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가 올라왔다. 무려 42자였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과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등 긴 제목이 유행했던 1980~90년대 노래보다 글자수가 오히려 두 배 많다.

찰나의 직관이 환영받는 디지털 시대다. 단절의 언어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 가수들이 긴 제목을 고집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록밴드 잔나비는 20세기 밴드 산울림의 창작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산울림의 노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같은 문장형 제목으로 여운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잔나비가 ‘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처럼 긴 제목을 즐겨 쓰는 이유다. 잔나비의 보컬인 최정훈(27)은 본보에 “노래를 다 듣고 제목을 다시 곱씹어 봤을 때 ‘쿵!’하고 어떤 느낌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며 “그렇다 보니 간결한 것보다 구차해 보여도 제목이 긴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정훈은 가수 박인희의 노래 ‘스카브로우의 추억’(1970)을 즐겨 듣는다. 그가 리더인 잔나비는 1970~80년대풍의 음악에 여운이 넘치는 제목으로 요즘 ‘힙스터’들을 사로잡는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긴 제목 바람은 옛 음악 유행의 부산물”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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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K팝 그룹 투머로오바이투게더는 신곡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로 활동한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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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여지 줘” K팝 아이돌도 모험

언어가 점점 단출해지고 노랫말에서 정서적 갈증을 느끼는 시대, 긴 제목은 일종의 대안이다. 박생강 작가는 “긴 제목 유행은 기계적이고 단절된 감정 전달이 주를 이루는 줄임말 세상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해석했다.

김다슬(25)씨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가사와 멜로디 반복이 많은 K팝에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며 “악동뮤지션이나 잔나비의 긴 노래 제목을 보면 ‘이 노래 감성이 좀 있구나’란 생각에 가사를 찾아보게 된다”라고 말했다. 서혜연(26)씨는 “긴 제목들에서 더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며 “긴 제목들은 기억하긴 어렵지만 오래 기억되는 것 같고, 짧은 제목들은 기억하긴 쉽지만 오래 기억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중소 음악기획사에서 가수 발굴과 곡 수집(A&R)을 돕는 관계자는 “제목 글자수가 11자를 넘어가면 음원사이트 재생 창에서 제목이 잘리지만 곡의 서정성을 부각하며 때론 긴 제목으로 청취자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만큼 굳이 제목을 줄이려 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K팝 아이돌그룹도 긴 제목의 유행을 발 빠르게 따라가고 있다. 방탄소년단을 배출한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한 신인 그룹 투모로오바이투게더는 21일 새 앨범 ‘꿈의 장: 매직’ 타이틀 곡으로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를 내세웠다. 9와 4분의 3 승강장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주인공인 해리포터가 마법 학교인 호그와트로 갈 때 이용하는 열차 승강장이다. 힘든 현실의 탈출구를 은유적으로 곡에 활용했다. 강력한 비트와 군무로 소비되는 K팝 아이돌이 19자의 긴 제목으로 문학적 호기심을 자아내며 차별화에 나선 것이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정해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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