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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원리’로 본 인류의 남은 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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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존재가 아니다’는 전제로

잔존수명 계산하면 5100~780만년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는 교훈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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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장벽 붕괴 20년 전인 1969년에 ‘베를린장벽이 1993년 이전에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한 과학자가 있었다. 미국 프린스턴대 천체물리학자 리처드 고트 교수다. 동서냉전의 정점을 달리고 있던 당시로선 무모하다고 할 만한 시도였다. 그해 여름 베를린을 방문한 그는 장벽 앞에서 붕괴 시기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추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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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베를린장벽을 방문한 시기도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졸업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이곳에 들렀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방문 시기는 장벽의 시작과 끝 사이 어떤 지점에 있을 것이다. 장벽의 시작점은 1961년이다. 끝지점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끝이 있다고 치고, 이를 4개 분기로 나눈다. 내가 방문한 때는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4개 분기 중 어디에나 속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문 시기가 2~3분기에 속할 확률은 50%다.”

그가 베를린장벽을 방문한 때는 8년이 지났을 때다. 이때가 2분기 시작점이라면 장벽 존속 기간은 24년이다. 붕괴 시기는 1993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때가 3분기 끝이라면, 각 분기는 2.66년에 해당하므로 장벽은 1971년에 무너진다. 결국 50% 확률로 장벽이 1971~1993년에 무너진다는 결론이다. 운 좋게도 베를린장벽은 그의 예측 범위인 1989년에 무너졌다.

추론의 핵심은 ‘누구도 무엇도 특별하지 않다’는 전제에 있다. 이를 `코페르니쿠스 원리'라 부른다. 500년 전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아닌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그래서 지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태양중심설을 들고 나왔다. 코페르니쿠스 원리는 이후 두 차례 더 인류의 인식 지평을 뒤흔들었다.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인류는 태양도, 은하수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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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예측이 맞아떨어진 데 고무된 그는 이 방법을 인류의 잔존 수명에도 적용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1993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그는 인류의 수명 계산에선 50%가 아닌 95% 기간을 관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통계학적 신뢰의 지표로 삼는 비율이 통상 95%인 점을 의식한 선택이다. 베를린 장벽과 같은 방식으로 추론했다. `내가 관찰하는 지금 이 시점이 전체 기간의 95% 기간에 있을 확률은 95%다. 그 범위 밖에 있는 양쪽 2.5%는 전체의 40분의 1이다. 만약 지금이 95% 기간의 맨 앞쪽이라면 시작에서부터 2.5% 지난 시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난 기간은 40분의 1이고, 남은 기간은 40분의 39다. 지금이 95%의 끝이라면 남은 기간은 2.5%다. 40분의 39는 지나갔다. 미래는 과거의 39분의 1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뢰도 95% 조건에서, 내가 관찰하는 대상의 미래 수명은 지난 기간의 39분의 1~39배 사이에 있다.'

고트는 학계 통설인 20만년 전을 인류의 시작점으로 설정했다. 코페르니쿠스 원리에 따라 우리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가정하고, 95% 신뢰도 공식을 적용하면 인류의 종말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100~780만년이라는 계산 결과가 나온다. 그는 논문에서 이런 추정은 화석 기록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생물 종의 수명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논문은 단박에 큰 화제를 모았다. 그의 가설을 소개한 잡지 <뉴요커> 기사의 제목이 `모든 것을 예측하는 방법'인 것을 보면 당시 그의 주장이 얼마나 흥미롭게 비쳤는지 짐작이 간다.

코페르니쿠스 원리에 따른 계산법엔 과학적 예측에 필요한 여러 상황변수 등에 대한 고려는 없다. 유사과학으로 치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과 상관없이 인류의 미래 예측이나 전망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대전제를 새삼 일러준다. 그것은 `우주에서 특별한 존재가 아닌'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는 점이다. 그 시간을 더 늘리고, 줄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고트는 95%의 확률로 그 기간을 제시했다. 물론 확률은 현실이 아니다. 인류의 운명을 결정해 온 건 확률이 아니라 선택이었고, 계산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종말의 시간 대역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95% 기간을 넘어서지 말라는 법도 없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고트의 예측은 적중하고, 인류와 지구는 파국을 향해 치달을 것이다. 고트는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많은 기후과학자는 기후변화가 가져올 지구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준비 기간은 겨우 10여년 남았다고 말한다. 물론 기후변화가 진행된다고 해서 당장 세상이 종말을 맞지는 않는다. 인류는 변화된 환경에 맞는 대응법을 개발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무한정 있지는 않다는 걸 코페르니쿠스 원리는 일깨워준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곽노필의 미래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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