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베를린 장벽의 기억, 21세기 정치인의 근육질 정치 만들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장벽붕괴, 냉전해체 이어 정치지형도 바꿔

일극체제·신냉전·중국부상·테러·포퓰리즘

동독 과학자 메르켈, ‘통합의 정치’ 매달려

KGB 스파이 푸틴, ‘강한 러시아’ 강박관념

시당 위원장 시진핑, ‘부국강병’ 통제정치

부동산업자 트럼프, '거래의 기술' 몰두

냉전 무경험 중학생 마크롱, ‘탈이념 정치’

반유럽 언론인 존슨, ‘브렉시트’ 설거지

지난 9일로 30주년을 맞은 베를린 장벽의 기억은 현재 21세기 세계를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어떤 정신적·심리적 영향을 줬을까? 동독은 물론 동유럽과 소련의 몰락과 냉전 해체로 이어진 베를린 장벽 붕괴는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당시를 살던 개인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지도자들의 정치 방식이나 신념, 지향점과 의지에도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중앙일보

베를린 장벽 붕괴 한 달 전인 1989년 10월 6일 마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왼쪽)이 동베를린을 방분해 에리히 호네커 동독 국가평의회 주석을 만나 사회주의 연대 방식으로 입을 맞추는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부인인 라이사 고르바초프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베를인 장벽 붕괴와 독일 재통일, 냉전해체의 전야제다. [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냉전 해체의 주역들, 역사의 뒤안길로

1989년 당시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세계 지도자는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1930~2017년, 82~98년 재임), 미국의 조지 HW 부시 대통령(1924~2018년, 89~93년 재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1931~, 85~91년 재임).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1916~96년 81~95년 재임),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1925~2013년, 재임 79~90년) 등이다. 이 가운데 고르바초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냉전해체를 이끌었던 주역이 됐다. 베를린 장벽과 냉전 해체 뒤 지난 30년 동안 세계는 미국의 일극체제를 거쳐 중국의 경제적·군사적·정치적 부상, 극단주의 조직이 벌이는 테러의 시대와 신냉전 시대를 맞고 있다. 동유럽과 중남미에서는 좌우 할 것 없이 포퓰리즘이 극성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냉전해체는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이끈 시발점이다.

현재 세계 정치는 이들 나라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와 함께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이끌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들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어떤 위치에서 일하면서 변혁의 역사를 지켜봤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이들이 현재 보여주는 정치 행태를 ‘정신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베를린 장벽 붕괴 뒤 동독의 과학자에서 통일 독일의 정치인으로 변신한 앙겔라 메르켈(왼쪽) 동독 기독민주당 부대변인이 1990년 10월 14일 동독에서 유일하게 민주선거로 당선한 총리이자 마지막 국가 원수인 로타르 데 마치에어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과학자 메르켈, 장벽 붕괴하자 정치로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의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물리화학 연구소에서 양자화학 연구원으로 일하던 35세의 젊은 과학자였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1978~1990년 이 연구소에서 일한 메르켈은 1986년 양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메르켈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방송에서 소식을 듣고 수많은 사람과 함께 동서 베를린 사이의 검문소를 넘어 서베를린으로 갔다. 서베를린에서 그는 공중전화로 서독의 함부르크에 살던 숙모와 통화했으며 중심지인 쿠담 거리를 걷다 동베를린으로 돌아갔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감격은 평범한 과학자로 살던 메르켈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메르켈은1990년 연구소를 그만두고 ‘민주주의의 출발(DA·Demokratischer Aufbruch)’이라는 정치단체의 창립 회원이 됐다. 이전까지는 동독의 자유독일청년회 과학아카데미에서 지구선도위원과 선전부 의장을 지낸 것이 조직 활동의 전부였다.

메르켈은 DA의 대변인으로 일하다 1990년 동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른 자유선거에서 DA와 동독 기독교민주당(CDU·서독 기독교 민주당과 별개의 정당이지만 성향이 동일해 재통일 뒤 통합)과 정당연합을 이루고 동독의 마지막 국가수반이던 로타르 더 메치에어 총리 정권에서 부대변인을 맡았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 직후 열린 CDU 전당대회에 참석해 헬무트 콜 총리를 처음 만났으며 그해 12월 2일 통일독일의 연방의회 선거에서 옛 동독 북부의 메클렌부르크포에포메른 주에서 CDU 소속으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했다. 초선 의원 시절인 1991년 1월 18일부터 1994년 11월 17일까지 연방정부의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장관을 맡았으며 1994년 11월 17일부터 1998년 10월 26일까지는 환경부 장관으로 일했다. 2000년 4월 10일 당시 야당이던 CDU 당대표를 맡았던 그는 2005년 총선 승리로 그해 11월 22일부터 지금까지 총리를 맡고 있다. CDU 당대표직은 2018년 12월 7일 내놓고 지금은 총리만 맡고 있다.



장벽 붕괴 감격, 메르켈표 통합 정치로 이어져



베를린 장벽 붕괴는 과학자 메르켈을 정치로 이끌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목사의 딸로서 동독에서 교육받은 메르켈은 옛 동독 지역을 지역구로 하는 정치인으로서 옛 동서독의 정치적 통합의 상징이 되어왔다. 베를린 장벽 당시의 감격을 현실적인 통합 정책으로 풀어내는 데 정치력을 집중해왔다. 메르켈은 그동안 동독 출신의 CDU 젊은 기수로서 동서독은 물론 유럽과 난민문제에서 ‘통합의 정치’를 해온 것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감격이 한몫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이 이른 올해 옛 동독지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옛 서독지역의 75%, 임금은 84% 수준이다. 여전히 75%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과 통독 당시 48%에서 이렇게 성장한 것은 대단한 성과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럼에도 메르켈은 독일 정치에서 옛 동서독 간 갈등을 줄이고 통합을 가속화한 촉매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중앙일보

KGB 제복 차림의 불라디미르 푸틴[중앙포토]






KGB 스파이 푸틴, 동독서 기밀서류 불태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소련의 첩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동독 드레스덴 주재 정보원이었다. 미국과 더불어 냉전시대를 이끈 거대 공산제국 소련의 스파이로서 위성국가인 동독에서 활동하던 푸틴은 자부심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레닌그라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75년 KGB에 들어가 1985~1990년 동독에서 마샤 게센이라는 가명으로 첩보활동을 했다. 푸틴의 공식 전기에 따르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바로 그 시간, 그는 당시 동독 반정부 시위대의 진입에 대비해 사무실에서 기밀 서류를 불태우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당시 공산체제의 몰락을 직감하고 소련 해체의 위기감을 온몸으로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과 공산체제를 수호하는 조직이나 다름없는 KGB의 해외 첩보원으로서 푸틴은 국가의 몰락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체험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뒤 소련으로 돌아간 푸틴은 KGB를 그만두고 고향인 레닌그라드에서 아나톨리 소브착 시장의 국제담당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푸틴은 1999년 공산주의에 대해 “눈먼 뒷골목이며 문명의 주류와 동떨어졌다”고 비판했지만 소련 붕괴에 대해선 최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인 재앙‘으로 표현했다. 공산주의에는 회의적이지만 강력한 러시아에 대해서는 향수를 나타낸 셈이다.

중앙일보

1980년대 부모와 자리를 함께 한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중앙포토[





체제붕괴 목격 푸틴, ‘강력한 러시아’ 강박관념



이런 푸틴은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를 공산주의 시절에 버금가는 강력한 통제 국가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내부적으로는 정적 탄압과 언론 검열, 민주세력 탄압 등 강력한 국가주의적 통제정치를 계속해왔다. 민주주의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는 비난을 받는다. 외부적으로는 냉전해체 이후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동유럽과 옛 소련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왔다. 2013년 3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합병하고, 중국과 손잡고 국제문제에서 사사건건 미국에 맞서며 강력한 러시아의 부활을 추구해왔다. 전 세계가 독재자나 학살자로 비난하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정권을 끝까지 지원한 것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푸틴의 거친 행동의 배경에는 ‘강한 국가’에 대한 강박관념을 엿볼 수 있다.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동독 주민들이 몰려올까봐 KGB 밀실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기밀서류를 황급히 불태우던 KGB 요원의 가슴 속에서 일었을 ‘약한 국가에 대한 한’이 그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중앙일보

1989년 12월 푸젠성 닝더 지구 당위원장 시절에 농촌 활동에 나서고 있는 시진핑(오른쪽).[중앙포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동유럽 몰락 충격 시진핑, ‘부국강병’에 매달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베를린 붕괴 당시 푸젠(福建)성 닝더(寧徳) 지구 당위원회 서기를 맡아 한창 권력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1975년 칭화(靑華)대 화공계열에 추천으로 입학한 시 주석은 1979년 대학을 마치고 국무원 겅뱌오(耿飈) 부총리의 비서 3명 중 1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현역 군인이기도 했다. 1982년 이후 지역 공산당 간부로 일한 시 주석은 1985년 허베이(河北)성에서 일할 당시 가공식품 시찰단으로 미국 아이오와 주에 시찰을 다녀왔다. 그의 첫 서구 방문이었다.

그 뒤 88~90년 닝더에서 당서기를 맡았다. 닝더 지구는 1999년 11월 닝더 시로 승격됐으며 현재 330만 명이 거주한다. 시 주석은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勳·1913~2002년))의 아들로 문화대혁명 당시 농촌에 하방된 부친을 따라 옌안(延安)의 토굴에서도 사는 등 고초를 겪었다. 시중쉰은 1978년 광둥(廣東)성 제2부서기로 복권된 뒤 광둥성 제1서기를 지내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에 올랐다. 개혁파인 시중쉰은 광둥성 심천을 경제특구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인물로 알려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시중쉰은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아들 시진핑은 닝더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중앙일보

1985년 미국 아이오와 주를 방문했을 당시 현지 신문에 게재된 시진핑(뒷줄 오른쪽에서 둘째)의 모습. [중앙포토]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독일 재통일과 소련·동유럽 몰락, 그리고 냉전해체로 이어졌다. 중국은 북한·쿠바·라오스 등과 함께 전 세계에 남은 드문 일당독재 국가가 됐다. 중국은 이미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년)의 주도로 개혁·개방에 나서 공산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로 이행하고 있었지만 일당독재 체제는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은 중국 공산당에 충격을 주었다. 중국 공산당은 존재의 이유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답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이었을 것이다. 가난을 극복한 중국, 먹고 살만한 중국을 유지하지 않으면 공산당 일당독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중국은 개혁개방을 가속화하고 경제 성장을 계속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가 준 충격은 당시 닝더시 당서기를 맡고 있던 시진핑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 절박감의 기억이 오늘날 중국을 지배하는 부국강병과 강력한 통제사회 건설이라는 시 주석표 통치 방식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 세계가 뭐라고 비판해도 귀를 막는 것은 공산당이 살아남으려면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앙일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젊은 시절 모습.[중앙포토]


부동산 개발업자 트럼프, '거래의 기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부동산 사업을 키우고 있었다. 그가 대필작가를 동원해 펴낸 『거래의 기술』에 따르면 트럼프는 1980년대 후반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든 다음 자신이 원하는 자가용 비행기나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이는 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 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나 일본의 아베 총리를 데려간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라라고 리조트도 그런 식으로 헐값에 사들이고 자신의 사업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방이 118개나 있던 이 대저택을 불과 300만 달러에 사들였다. 해변의 자투리 땅을 사들여 마라라고로 이어지는 통로를 막고 높은 건물을 지어 경관을 망치겠다고 위협한 끝에 이를 말도 안되는 가격에 사들였다는 보도도 있다. 국정과 동맹을 대하는 데도 비슷한 방식을 쓰는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한창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중앙일보

사회적 대토론 에 나서 국민과 직접 대화하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중학생이던 그는 냉전 무경험자로 좌우 이념 대결에 관심이 없는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학생 마크롱은 좌우에 구애되지 않아



1977년생인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중등학교 학생이었다. 냉전의 기억에 희미한 세대라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마크롱은 좌우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는 새 정치를 펴고 있다. 마크롱은 2017년 대선에서 전통적으로 프랑스 정치를 양분해왔던 좌우파 모두에 궤멸적인 타격을 주며 새로운 ‘탈이념’의 새정치를 시작했다. 프랑스 병을 고치기 위해 우파 방식의 노동개혁을 한 데 이어 좌파 방식의 연대 정치를 펴며 복지를 강화하고 있다. 마크롱이 이념에 매몰된 기존의 정치를 대신해 좌도 우도 아닌 국민을 위한 정치를 추구하는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 냉전 시대의 이념 정치를 겪지 못한 것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중앙일보

1980년대 기자 시절부터 유럽 통합에 반대했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AF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자였던 존슨 영국 총리, 반유럽통합 강조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 무렵 더타임스를 거쳐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존슨은 브뤼셀 특파원을 맡으면서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유럽회의주의 기사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하원의원(2001~2008년)에 이어 런던 시장(2008~2016년)을 지냈다. 2015년 하원의원으로 복귀해 2016~2018년 외무장관을 지낸 뒤 올해 7월 총리에 올랐다. 현재 그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마무리하는 ‘설거지 정치’를 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가 가속화한 유럽 통합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브렉시트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가 EU와 재협상까지 해서 들고 온 브렉시트 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자 12월 12일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상태다. 영국은 브렉시트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의회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평가까지 듣고 있다. 이 때문에 EU 탈퇴를 외치던 유럽의 극우 정치세력이 더는 이를 정치 의제로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처럼 베를린 장벽은 전 세계의 정치 지형도를 바꿨다. 1989년 벌어진 이 대사건은 21세기 정치인들의 심리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는 현실정치로 나타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반도의 정치인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대사건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