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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영·미, 전쟁범죄 덮고 살인죄 사면하고…‘인권국가’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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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타임스, “정부가 전쟁범죄 조사 중단”

이라크·아프간전 조사팀, “조작·은폐 의혹”

존슨 총리 취임 뒤 “영국군 마녀사냥 중단”

미국 트럼프는 살인죄 전범 전격 사면

살인죄 벗은 ‘주검 모독’ 장교는 재진급

국방 전문가 “군 지휘계통·규율 흩트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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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당시 자국 병사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감추거나 심지어 혐의자들을 사면하고 강등된 계급을 복원시켜주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2001년 9·11 동시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구실로 두 나라가 주도한 아프가니스탄(2001년)과 이라크(2003년) 전쟁의 명분이 빛이 바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정부와 군부가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서 어린이들을 포함한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하고 고문하는 등의 전쟁범죄를 감춰온 사실이 드러났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과 일간 <더 타임스>의 일요판 <선데이 타임스>가 17일 보도했다. 영국 정부는 특별조사팀의 조사로 파악된 범죄 혐의자들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거나 “정당방위”라는 이유로 단 한 명도 기소하지 않은 채 조사를 종료하고 기밀에 붙였던 사실도 확인됐다.

이런 사실은 <비비시> 방송의 간판 다큐멘터리 ‘파노라마’와 <선데이 타임스>의 탐사보도팀이 2010년 영국 정부가 민·군 전문가들로 구성한 이라크 전쟁범죄 특별조사기구인 ‘이라크 역사적 혐의 조사팀(IHAT·이라크조사팀)’과 2014년 설립된 아프간 전쟁범죄 조사 프로젝트인 ‘오퍼레이션 노스무어’에 참여했던 조사관 11명을 취재해 확보한 증언들로 드러났다. <선데이 타임스>는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영국군의 비인도적 처우들의 증거가 (영국 남서부 윌트셔에 있는) 군 기지의 철조망 안쪽에서 두툼한 2개의 파일에 잠자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신문은 “(보수당 다수의) 영국 의회는 ‘이라크조사팀의 조사가 실제 증거가 없으며, 고객의 보상을 바라는 변호사가 무고한 영국 군인들을 괴롭히려는 조잡한 주장에 의한 것으로 ‘완전한 실패’라는 딱지를 붙였다”고 덧붙였다. 영국 국방부는 2017년 위 두 개의 전쟁범죄 조사팀 활동을 전격 중단했다.

<비비시>는 필 샤이너 변호사가 이라크조사팀에 1000여건의 사례를 제공했으나 이라크 쪽 제보자들에게 증언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혐의로 제명된 뒤, 국방부가 전쟁범죄 조사를 전격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두 조사팀에 참가했던 조사관들은 샤이너 변호사의 행위는 정부가 전쟁범죄 조사를 중단하는 구실로 악용됐다고 지적한다. 한 전직 조사관은 “영국 국방부는 군인의 계급이 무엇이든 아무도 기소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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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시>는 전쟁범죄의 ‘새로운 증거’ 중 한 사례로, 2003년 이라크 남부 도시 바스라 거리를 순찰하던 영국군의 한 병사가 주택가 골목길의 자택에서 나오던 이라크 경찰관을 사살한 사건을 들었다. 당시 병사의 지휘관은 사건 발생 24시간도 안 돼 이라크 경찰관이 먼저 총격을 해 영국군 병사가 자위권 차원에서 응사했다는 동료 병사의 증언을 근거로 부하 병사의 총격이 합법이란 결론을 냈다.

그러나 이라크조사팀은 2년에 걸쳐 80명의 영국 군인들을 면담한 끝에 위 사건의 처리가 조작된 사실을 밝혀냈다. 목격자로 거론된 동료 병사가 자신은 사건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으며 한 발의 총성만 들었다며 “사건 보고서는 부정확하고 내가 목격자란 인상을 주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고 진술을 번복한 것이다. 조사팀은 총격을 한 병사와 지휘관이 각각 살인 혐의와 사건 은폐 혐의로 기소돼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군 검찰은 아무도 기소하지 않고 사건을 덮었다.

앞서 지난주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은 “지난해 국방장관이 (영국군 장병에 대한) ‘마녀사냥’을 끝내겠다고 했음에도 군인 수십명이 이라크 전쟁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해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며, 새로운 조사팀이 모두 27건의 전쟁범죄 혐의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영국 국방부는 전쟁범죄 조사 현황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데일리 메일>은 “이같은 비공개 정책은 올여름 보리스 존슨 총리가 취임한 뒤 영국군에 대한 마녀사냥 금지를 강조하고 새로운 전역장병 기구를 설립한 이후에 나온 것”이라고 짚었다.

영국 언론들의 보도에 대해 영국 국방부는 “(전쟁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와 기소 결정은 국방부와는 독립적으로 외부의 감독과 법적 자문으로 이뤄진다”며 “비비시 방송 보도는 여전히 혐의를 조사 중인 군 경찰과 사법당국에 통첩했다”고 밝혔다. <비비시>는 18일 저녁 9시(현지시각) 영국군의 전쟁범죄와 은폐 실상을 취재한 ‘파노라마’ 프로그램을 방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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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범죄로 기소된 군인들을 미리 사면하고 계급이 강등된 군인의 계급까지 복원시켜주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6일 “트럼프 대통령이 3건의 군사재판에 개입해, 국방부 법무관들과 고위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명을 완전히 사면하고 다른 1명의 계급 강등 판결을 뒤집었다”고 보도했다. 앞서 전날 밤 백악관은 성명을 내어 “트럼프 대통령이 최고사령관으로서 군법의 집행과 적절한 사면의 최고 책임이 있다”며 “지난 200여년 동안 미국 대통령들은 제복을 입고 국가에 헌신한 이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권한을 행사해왔다”고 밝혔다.

트럼프가 사면한 이들은 아프간에서 민간인 사살 명령으로 2급 살인죄로 기소돼 2013년에 19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클린트 로런스 중위와, 역시 아프간 전쟁에서 살인죄로 기소돼 재판을 앞둔 매튜 골스타인 소령이다. 트럼프는 또 이라크에서 비무장 민간인과 포로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해군특전단 네이비실의 에드워드 갤러거가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고 주검 모독 행위만 유죄 판결을 받은 직후 강등된 계급을 복원시켰다.

<워싱턴 포스트>는 익명을 요구한 국방부 관리들을 인용해, 일부 지휘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조처가 군 사법 시스템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미국의 비영리 안보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필립 카터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결정은 미군이 지난 수십년간 베트남 전쟁과 그 시기 자행된 전쟁범죄의 유령들을 잠재우려 힘쓴 노력을 허물어뜨린다”며 “이번 같은 행정 사면은 군의 지휘계통을 흐리고 군법 위반에 대한 책임 추궁을 불확실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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