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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핫플 익선동·연희동 황금상권 누가 만들었을까…상권 창조 마술사 ‘젠트리파이어(Gentrif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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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수, 너는 망원. 한 정거장 전에 내려♬”

요즘 장안의 화제인 유산슬(유재석)의 트로트 데뷔곡 ‘합정역 5번 출구’의 첫 소절이다.

상수동과 망원동. 강북의 낡은 골목이었던 두 곳은 요즘 서울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동네로 변모했다. 여기뿐이랴. 연남동, 연희동, 익선동, 후암동, 중림동 등. 10년 전만 해도 동네 한 골목길 정도의 위상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의 골목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젠트리피케이션.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돼 중산층 이상 계층이 유입되면서 기존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을 말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서울에 국한된 모습은 아니다. 서구 사회도 비슷한 모습을 겪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는 1964년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런던 도심지에서 발생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런던 사람들은 더 나은 주거환경을 찾아 런던 외곽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빈 도심은 문학가·배우 등 예술가, 지식인 계층이 메웠다.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주로 노동자들이 모이던 지역, 즉 도심 노후 건물로 들어가 주거환경을 새롭게 바꿨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시작이다.

한국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유난히 부정적인 모습만 부각된다. 2016년 국립국어원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대신하는 순우리말로 ‘둥지 내몰림’을 제안했다.

사실 도시는 끊임없이 숨 쉬고 변화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된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고 도심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임대료 상승의 결과인 ‘원주민의 비자발적인 이주’가 문제가 된다.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단어를 곧이곧대로 ‘원주민’이 쫓겨난다는 의미만 내포한 ‘둥지 내몰림’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손창현 오버더디쉬 대표는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이라며 “젠트리피케이션 자체보다 기존에 거주했던 원주민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점이 문제”라고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과연 ‘누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일까. 젠트리피케이션과 함께 등장한 단어가 바로 ‘젠트리파이어(Gentrifier)’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는 사람이란 뜻이다.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단어인 젠트리파이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매경이코노미

젠트리파이어는 누구?

▷도심에 활기 불어넣는 新계층

‘쇠퇴했던 구도심을 특색 있는 장소로 탈바꿈시켜 활기를 잃었던 공간을 사회·경제·문화적으로 활성화하는 능력을 지닌 계층’.

젠트리파이어의 사전적 정의다.

인문지리학자인 데이비드 레이는 “젠트리파이어는 일반적인 중산 계층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며 이들을 가리켜 ‘문화적 신계층’이라 칭했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갖고 있으며 예술, 미디어, 교육이나 비영리단체에 종사하는 전문가 집단이다.

젠트리파이어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문화·소비생활이다. 자신이 일하는 도심에서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비교적 저렴한 주택에 거주하며 문화적 생활을 즐기기를 원한다. 이 때문에 젠트리파이어가 거주하는 구도심 지역에는 트렌드를 반영한 레스토랑, 쇼핑·엔터테인먼트를 위한 장소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경신원 ‘도시와커뮤니티연구소’ 대표(인터뷰 참조)가 쓴 ‘흔들리는 서울의 골목길’이란 책에는 젠트리파이어를 3가지 단계로 구분해 설명한다. 젠트리피케이션 초기 단계에는 작가, 음악가 등 예술가나 레즈비언, 게이 커뮤니티 등에 속한 사람이 젠트리파이어가 된다. 대부분 독신이거나 아이가 없는 젊은 커플이 많다. 일반적인 중산층과 비교해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계층이다. 이들에게는 자녀 학교 문제나 주거지역 안전 문제가 큰 이슈는 아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임대료가 낮은 노동자 계층 지역으로 이주한다.

젠트리피케이션 초기 단계를 지나 과도기에는 구도심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진보 성향의 저널리스트, 교육자 등이 이주한다. 말기 단계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고소득 전문가나 관리 계층이 이주한다. 동시에 주택이나 토지 가격이 급격히 상승해 이때 원주민뿐 아니라 초기 단계 젠트리파이어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주한다.

한국의 젠트리파이어는 어떤 사람일까.

대체로 서구 사회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먼저 경제적·인적·문화적 자본 3박자를 고루 갖춘 사람이 많다. 가게를 오픈하면 와줄 사람, 즉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이들이 대부분이다. 문화적 자본이 있어 매장 인테리어를 스스로 하는 것은 기본.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추고 예술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한국 젠트리파이어의 또 다른 모습은 기본적으로 본인 직장이 있으면서 부업 형태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가게는 취미생활, 커뮤니티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자율적이면서 독창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며 경제적 윤택함보다 삶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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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은 과거 출사 장소로 알려졌다면 요즘은 아기자기한 골목길 상권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사진 : 윤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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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핫플인 ‘익선동’

▷친구들 아지트가 힙한 장소로

경제·사회·문화적 자본을 갖춘 지식인이 젠트리파이어의 요건이라면 유정수 글로우서울 대표는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서울에서 요즘 떠오르는 핫플 중 하나인 익선동. 불과 5년 전만 해도 도심에 위치한 골목길에 불과했던 익선동은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됐을까.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유 대표가 친구들과 아지트처럼 자주 가는 술집이 종로3가에 있었다. 유 대표 대학 동창이 10년간 운영했던 곳이다. 마치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나오는 커피숍 ‘센트럴퍼크(Central perk)’와 유사한 모습. 경영상 이유로 술집이 문을 닫으면서 유 대표의 아지트가 사라졌다. 유 대표는 고민 끝에 스스로 아지트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현대적 감각을 살린 ‘글로우키친’이란 식당을 익선동에 열었다. 직장은 그대로 다니면서 부업으로 가게를 오픈한 경우다.

“당시만 해도 익선동은 유동인구가 많지 않았어요. 지금은 유명해진 익선동의 한 커피숍도 한 달에 커피 3잔만 팔릴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글로우키친 역시 처음에는 장사가 잘 안됐다. 틈틈이 입소문을 통해 오는 소비자나 ‘친구 찬스’로 어느 정도 명맥은 유지했지만 손해를 보는 달이 대부분이었다. 아지트가 필요하기는 했지만 마냥 돈을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유 대표는 더욱 과감한 선택을 한다. 전세금 등 끌어모을 수 있는 자금을 총동원해 사업을 더욱 확장하기로 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단순히 레스토랑만 있어서는 익선동 상권이 살아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골목길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걸 해보자 싶었죠.”

유 대표가 익선동의 가능성에 주목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당시 익선동은 상권이 활발히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사진이 잘 나오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른바 ‘출사의 포인트’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이를 믿고 과감히 투자한 것.

‘살라댕방콕’ ‘호텔쎄느장’ ‘익동정육점’ 등 SNS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가게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살라댕방콕은 태국 방콕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모습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사업을 크게 확대했지만 유 대표는 직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의지할 ‘마지노선’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사업 범위가 넓어진 만큼 가게를 운영하는 회사를 법인 전환하고 업무 영역 역시 ‘공간기획’으로 넓혔다. 직원 수가 급격히 늘었다. 8명에서 시작한 회사는 어느덧 160명이 됐다. ‘두 집 살림(?)’을 계속하던 유 대표가 기존 직장을 관둔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사업에 집중하면서 올해 7월에는 ‘NICE에프앤아이’로부터 60억원을 유치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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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경의선숲길은 연남동이 핫플레이스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 : 윤관식 기자>


상권 개척 지속 가능하려면

▷건물주·자영업자·주민 합심

보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상권을 살린 젠트리파이어도 있다. 김종석 쿠움파트너스 대표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과 연남동에 70채가 넘는 건물을 리모델링하며 ‘연희동 카페 거리’를 만든 주인공이다.

김종석 대표는 2010년부터 지자체와 손잡고 서울 연희동에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담장 허물기’ ‘노출 계단’ ‘1층 같은 반지하’ ‘공간 나누기’ ‘마당부 증축’ ‘문화행사 등 외부 콘텐츠와 연계’ ‘직접 재임대(전대)를 통한 임대료 상승 억제’ 그리고 이를 통한 젊고 개성 있는 다양한 상인 유치 등이다.

담장 허물기와 노출 계단은 요즘 유행한다는 ‘오픈 키친’보다 더 적극적인 오픈 본능이다. 길과 건물, 건물과 외부의 경계를 허물어 건물 내부로까지 길을 연장하는 ‘소통’을 추구한다.

“담장이 높으면 행인은 그냥 지나가지만, 낮아지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정원이나 공간에 호기심이 생겨 자꾸 쳐다보게 되죠. 길을 가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일어나 건물에 말을 걸게 되는 겁니다. 계단도 건물 내부가 아닌 외부로 끄집어내 노출시키면 행인도 호기심에 한번 올라가보게 돼요.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와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습니다. 계단을 길로 인식하게 돼, 마을 길이 건물 내부까지 연장되는 셈이죠. 마을 사람들 간의 심리적 경계를 없애는 것. 이것이 상권 활성화에 굉장히 도움을 줍니다.”

1층 같은 반지하도 마찬가지. 같은 1층 높이에서 가게 안을 보면 가게 안의 직원이나 고객은 외부로부터 감시받는 불편한 기분을 느끼기 쉽다. 반면 지대가 조금 낮은 반지하는 행인 시선이 자연스럽게 밑으로 향하게 된다. 사람은 원래 길을 걸을 때 10도 정도 고개를 숙여 살짝 아래를 보며 걷는다고 한다. 그러니 반지하 가게 안의 사람이 행인과 눈이 마주쳐도 감시받는 기분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 지나가나보다’ 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마주치면 서로 목적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살짝 내려다보는 각도에서는 시선이 엷어지죠. 또 위에서 내려다보니 사람뿐 아니라 가게 인테리어까지 넓게 보입니다. 가게 안 사람은 밑에서 올려다보니 사람뿐 아니라 하늘과 건물, 거리 같은 전경이 보이죠. 가게 안팎의 사람이 서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시선의 교차가 바로 반지하 가게의 매력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임차인 힘만으로 이뤄낼 수 없다. 건물에 변형을 줘야 하므로 건물주의 참여가 절실하다. 연면적 100평 기준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데 공사 기간은 약 6개월, 비용은 4억~5억원이 든다. 당장 목돈이 들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도시재생 효과가 나타나 건물주와 임차인(자영업자), 마을 주민, 외부 고객 모두 이익이라는 것이 김 대표의 주장이다.

2010년 연희동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약 10년이 지난 현재, 연희동은 카페 거리가 생겨나는 등 지속 가능한 상권으로 거듭났다. 소비인구는 현재 마을 주민 50%, 직장인 등 상주인구 30%, 외부에서 유입된 관광객 20%로 구성된다.

“최근 주목받은 송리단길은 개성 있는 가게가 많지만 상가 건물에 변화가 없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경리단길과 해방촌도 그랬어요. 마을 풍경이 아름답게 변화하지 않으면 상권이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핫플레이스를 넘어 명소가 돼야 합니다.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해 건물주나 투자자의 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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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을 낮추고 허물거나(위) 계단을 노출하면(아래) 길과 건물이 연결돼 마을의 소통을 활성화시킨다. <쿠움파트너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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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의미의 젠트리파이어

▷랜드마크 건물·소비자도 포함될 수 있어

익선동이나 연희동뿐 아니라 서울 곳곳에서는 젠트리파이어가 활동 중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상권 변화를 설명하는 데 주로 쓰이지만 원래 낙후된 도심 변화를 설명하는 단어다. 구도심의 변화를 설명한다는 측면에서 용산구 후암동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이다.

후암동은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용산구에서 가장 땅값이 싼, 달동네 느낌이 강한 동네였다. 후암동이 핫플레이스로 뜨기 시작한 것은 특색 있는 건물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다. 주인공은 이용의 공감건축사사무소장. 이 소장은 도심에 가깝지만 언덕이 많고 자투리땅이 많은 후암동에 주목했다.

경매로 후암동의 한 허름한 단독주택을 낙찰받은 그는 이곳을 협소주택으로 리모델링했다. 이후 5~6년 동안 그가 후암동에서 리모델링한 주택이나 상가만 약 50개. 지금 후암동은 각양각색의 주택이나 상가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골목길로 각광받는 지역이 됐다. ‘골목길의 변화’라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이 소장 또한 젠트리파이어인 셈이다. 이 소장은 “5년 전만 해도 후암동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거지역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며 “지금은 많은 주택이 리모델링되고 특색 있는 상가가 하나둘 들어서면서 소위 말하는 ‘핫플’이 됐다”고 말한다.

젠트리파이어는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소상공인, 공간기획자, 예술가 등이 거론되지만 특정 랜드마크 건물 자체가 젠트리파이어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있다. 성수동 ‘대림창고’가 대표적인 예다. 성수동의 변화는 대림창고 등장 전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수동에서 건축사사무소를 운영 중인 현창용 H2L건축사사무소 공동소장은 “대림창고가 성수동 변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라며 “넓은 의미에서 대림창고라는 랜드마크 건물 자체가 젠트리파이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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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익선동에 위치한 호텔쎄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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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젠트리파이어가 온다

▷공동체 차원에서 안정적 운영 고민할 때

미국, 일본 등 저성장이 고착화된 선진국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고 있지만, 한국의 상권 이동 속도는 유례없이 빠르다. 미국은 젠트리피케이션이 20~30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지만 한국은 짧으면 2년, 길어야 5년이다. 여기에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적 요인이 있다.

일단 1000만명이 모여 사는 서울이 워낙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다.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상권이 개발될 수 있는 잠재력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젠트리파이어에게는 ‘기회의 땅’이다. 여기에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기존 핫플레이스에 대한 매력을 금세 식게 한다. 유행하는 프랜차이즈가 금세 바뀌는 것도 한국인이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성향이 강한 탓이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에는 ‘핫플레이스’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명동, 홍대, 강남 같은 대형 상권과 일반 상권으로 나뉘었을 뿐이다. 그때만 해도 상권이 ‘낙후됐다’고는 말해도 ‘쇠퇴했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들어 각 지역 외곽부터 상권이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2014년을 정점으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장남종 서울연구원 연구위원(도시재생연구센터장)의 분석이다.

2020년대 한국은 경제성장률 2% 달성도 어려운 초저성장기에 접어들 터다. 이렇게 되면 소비 위축으로 상권의 하향 평준화는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새롭게 뜨는 핫플레이스의 매력을 상대적으로 더 부각시킴으로써 특정 상권에 대한 쏠림 현상도 더욱 강화할 전망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상화되고 그 주기는 더욱 짧아질 수 있다.

2020년 이후 진행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과거와 또 다른 모습을 띨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2000년대 1세대 젠트리파이어는 대체로 예술가가 많았다. 2010년 이후 등장한 2세대 젠트리파이어는 소규모 자본가나 공간기획자가 중심이었다. 3세대 젠트리파이어는 평범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일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초저성장기를 맞아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취업 대신 창업 전선에 내몰릴 것이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지녔고, 해외여행 경험도 풍부해 ‘자영업의 신인류’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다. 감각적인 비주얼의 인테리어와 SNS 마케팅, ‘힙’하고 개성적인 가게 등 젠트리파이어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소양을 모두 갖췄다.

다만 우려스러운 점은 자본이 적다는 점. 장사에 대한 감각은 2세대 공간기획자 못잖은데, 정작 자본은 1세대 예술가만큼이나 부족하다. 장남종 연구위원은 “이들은 젊은 감각과 힙스터 문화, 능숙한 시각화 등 장점이 많아 한 사람, 한 사람이 충분히 ‘로컬 크리에이터(Local Creator)’가 될 수 있다. 지역성과 공공성의 가치를 심어주고 협동조합식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활동가나 전문가 집단이 지원하는 정책 모델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3세대 젠트리파이어 정착과 관련해서는 해외 사례, 특히 ‘록스베리 토지신탁’ 모델을 여러 지자체에서 참고할 만하다. 미국 보스턴시 록스베리 지역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민들이 직접 움직였다. 지역 주민들은 협동조합을 만들고 여러 곳에서 자금을 유치해 조합 명의로 땅을 샀다. 이렇게 만들어진 록스베리 토지신탁은 보유한 토지를 저렴하게 임대하고 있다. 지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토지신탁 제도는 저가 주택 공급뿐 아니라 과도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에도 일조하고 있다.

인터뷰 | 경신원 ‘도시와커뮤니티연구소’ 대표

젠트리피케이션 자체보다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이 문제

매경이코노미

경신원 ‘도시와커뮤니티연구소’ 대표는 최근 ‘흔들리는 서울의 골목길’이란 책을 통해 서울 젠트리파이어를 집중 탐구했다. 15년간 영국과 미국에서 주택·도시 개발 분야 연구자로 활동한 그는 ‘이태원의 변화’를 젠트리파이어란 키워드로 녹여냈다. 경 대표를 만나 젠트리파이어는 누구며 젠트리피케이션의 명암은 무엇인지 물어봤다.

Q 젠트리파이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A 약간 깨어 있는 지식인, 사회운동가, 문화 창조 계층이 젠트리파이어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다. 이들은 사회 변화를 원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기회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일각에서는 젠트리파이어에 대해 상권을 만들어놓고 쫓겨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젠트리파이어를 인터뷰해보면 이들이 정들었던 동네를 떠나는 것은 비단 임대료 때문만은 아니다. 가치관이 다른 건물주와 싸우는 것이 싫어 나가는 경우도 많이 봤다. 그들은 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것보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소수의 소비자’를 원한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동네를 떠난 경우도 있다.

Q 한국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알려진 것 같다.

A 자연스러운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된 동네를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문제는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했을 때다. 서구 사회에서 발견되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젠트리파이어가 발전시킨 동네에는 대규모 자본가 혹은 대형 개발업자가 진입해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소상공인의 비자발적인 이주가 있기는 하지만 이후 대규모 자본에 의한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골목길 상권은 상승한 임대료와 함께 정체됐다가 급격히 쇠퇴하는 현상을 보였다. 삼청동, 경리단길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트렌드가 워낙 빨리 바뀌는 데다 대규모 개발업자가 들어오기 전 소규모 자본가(건물주)에 의해 임대료 상승이 이뤄지면서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Q 골목상권 부활은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안고 있는 고민인 것 같다.

A 골목상권을 살리고 싶다면 동네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기획가가 필요하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동네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트렌드성이 강한 식당만 많이 모여 있다는 점이다. 먹는 것 외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필요하다. 또 필요한 것은 선적인 형태의 휴식공간이다. 상권이 원 형태로 유지되는 것보다 선을 중심으로 형성되면 집객력을 유지할 수 있다. 서울에서 대표적인 곳은 바로 경의선숲길, 즉 연남동이다. 소위 말하는 연트럴파크를 중심으로 좌우로 상권이 형성되다 보니 길을 따라 즐길 콘텐츠가 풍부하다. 골목상권 부활을 고민하는 지자체는 선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재생을 고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강승태 기자 kangst@mk.co.kr, 노승욱 기자 inyeon@mk.co.kr / 사진 : 윤관식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34호 (2019.11.20~2019.11.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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