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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장관 일행·외교 사절 DMZ행까지 막는 ‘유엔사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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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불편” 내세워 남북협력 제동…“미국의 통제수단 악용”

장관만 대성동 방문 승인 취재진은 ‘주민 불편’ 이유로 막아

독일대표단 고성GP 방문에 딴지 국방장관 협조 요청도 묵살

불허기준도 그때그때 달라 “일제 총독부 떠올리게 하는 행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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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정부 대표단이 지난 6월10일 한국에 왔다. ‘제9차 한·독 통일자문위원회’(6월12~13일 강원도 평창) 참석이 목적. 정부는 비무장지대(DMZ) 남북 군사 대치의 증거인 감시초소(GP·지피)를 ‘9·19 남북 군사 합의’에 따라 철거한 사실을 기념하려고 영구 보존하기로 한 강원도 고성 ‘829 보존 지피’를 독일 대표단이 6월11일 둘러보는 일정을 준비했다. 전쟁 위기의 벼랑 끝까지 간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어떻게 군사 긴장을 낮추고 평화 과정을 진전시키는지 직접 눈으로 보게 하려는 조처다.

한·독 통일자문위원회는 통일부 차관과 옛 동독지역 재건을 총괄하는 신연방주특임관을 겸직하는 독일 경제·에너지부 차관이 의장이다. 올해 독일 대표단은 현직 신연방주특임관인 크리스티안 히르테 차관, 이리스 글라이케 직전 신연방주특임관, 호르스트 텔치크 전 독일 국가안보보좌관 등으로 꾸려졌다.

정부는 독일 대표단의 ‘829 보존 지피’ 방문을 성사시키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비무장지대 출입 허가권’을 지닌 로버트 에이브럼스 유엔군사령관한테 협조 요청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는 “안전상 이유로 불허”한다고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서호 통일부 차관은 에이브럼스 사령관한테 강력한 유감을 표하는 ‘항의 서한’을 보냈다. 유엔사는 어떤 ‘안전상 이유’가 있는지 끝내 설명하지 않았다.

6월의 비무장지대는 평화로웠다. 지난해 ‘9·19 군사 합의’ 이후 단 한 건의 충돌도 발생하지 않는 등 1953년 정전 이래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어서다.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 방지 차원에서 지금은 중단 상태이지만 ‘비무장지대 평화의 길’이 고성(4월27일)·철원(6월1일)·파주(8월9일) 구간 순으로 개방됐을 정도다. 지구에서 가장 엄격한 경호를 받는 미국 대통령이 6월30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과 사상 첫 ‘3자 번개 만남’을 한 사실은 유엔사의 ‘우려’가 핑계임을 웅변한다. ‘829 보존 지피’가 속한 군사분계선(MDL) 남쪽 비무장지대의 안전 확보 임무는 한국군 22사단이 맡는다. 유엔사는 사실상 하는 일이 없다.

8월 초엔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유엔사의 주권 침해적 횡포가 있었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8월9일 ‘파주 디엠제트 평화의 길 개방 행사’(경의선 도라산역)에 참석하는 김에 비무장지대 안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인 대성동마을을 방문하려 했다. 그런데 유엔사는 김 장관만 승인하고 동행 취재진의 방문은 불허했다. 불허 사유는 어이없게도 “주민 불편”. 대한민국 국무위원이 비무장지대 안 유일한 자국민 마을을 방문하는 모습을 취재·보도하는 게 “주민 불편”을 끼친다? 김 장관은 대성동마을 방문을 포기했다.

두 사례는 유엔사의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 통과·출입 허가권의 ‘감춰진 얼굴’을 드러낸다. 일관된 기준과 무관한 ‘그때그때 달라요’다.

김연철 장관은 10월21일 “(비무장지대 출입·통과가 필요한) 비군사적 성질의 환경·문화재 조사, 지피 방문 등에 대한 (유엔사) 허가권의 법적 근거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다”고 밝혔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군사분계선 통과 관련 유엔사 불허 때 그 정당성 여부를 다툴 제도적 장치가 없다. 법치주의에 완전히 어긋나는 상황”이라는 천정배 의원(무소속)의 지적에, 김 장관이 “정전협정의 조항을 보면 허가권은 군사적 성질에 속한 것으로 한정돼 있다”며 한 답변이다.

유엔사는 10월23일 “2018년 10월 이후 유엔사는 2200여건의 비무장지대 출입 신청을 받아 93% 이상을 승인했다”며 “대한민국의 주권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장관과 천 의원의 문답을 겨냥한 반박이다.

그러나 독일 대표단의 지피 방문은 “안전상의 이유”로, 통일부 장관의 대성동마을 방문 취재진 동행은 “주민 불편”을 이유로 불허한 사실이 “대한민국 주권 전적 존중”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요령부득이다. 유엔사가 밝힌 ‘93% 이상 승인’이란, 판문점 안보견학(관광)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남쪽 인력의 입출경 관련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문제적 수치는 ‘7% 불허’다. 유엔사가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 통과·출입 허가권을 남북의 화해협력을 통제하는 데 어떻게 악용하는지 실증하는 수치여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합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협력사업 관련 신청은 “한번에 승인된 사례가 거의 없을 정도”라는 한탄이 나온다.

유엔사가 “한국 정부와 협력” 사례로 꼽은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을 위한 북쪽 구간 공동조사단 방북 문제는 정부가 애초 계획한 2018년 8월22일에서 석달 넘게 흐른 11월30일에야 가까스로 성사됐다. 지난 2월12~13일 금강산에서 치러진 올해 첫 남북 민간교류 행사 동행 취재진의 노트북 등 취재장비 휴대 불허 사태도 방북 승인권을 지닌 유엔사의 ‘노트북 등은 제재 대상’이라는 문제제기가 시발점이 됐다. 뉴스 제작 장비는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도 임시로 북한에 가져갈 수 있도록 한 미 상무부 수출관리규정조차 외면한 무리한 불허 조처였다.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이 격화하자 사태 발생 두달여 뒤 미국 정부는 ‘앞으로 취재장비 반출은 문제삼지 않겠다’는 방침을 한국 정부에 알려왔다.

군사분계선 정중앙에 남북을 가로지르며 걸터앉은 궁예의 태봉국 철원성터 남북 공동 발굴·복원을 염두에 둔 남쪽 지역 현지조사를 위한 출입 신청을, 유엔사는 4월엔 승인하고 6월엔 불허하는 변덕을 부렸다. 철원성터 발굴·복원은 4·27 판문점선언의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와 ‘9·19 군사 합의서’의 “비무장지대 안 역사유적 공동 조사·발굴 군사 보장”(2조 4항) 합의에 따라 추진되는 협력사업이다.

전국체전 100회(10월4~10일, 서울)를 기념해 서울시가 추진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성화 봉송’을 위한 출입 신청을, 유엔사는 ‘공동경비구역 관리를 어렵게 하는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며 불허했다.

남북 협력사업과 관련해 유엔사와 협의 경험이 풍부한 전직 고위 관계자는 18일 “유엔사의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 통과·출입 허가권이 미국 정부의 남북협력사업 견제·통제와 제재 이행 감시 수단으로 악용되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며 “일제 강점기 총독부를 떠올리게 하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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