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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찌아찌아'부터 '피그미'까지… 지구촌 발음기호 된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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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9] 한글, 소수민족의 문자가 되다

찌아찌아족 한글 도입 10주년

시장·학교 등에 한글간판 내걸려… 배출한 한글 교육생만 2000여명

문자 없는 아프리카 피그미족은 고유 언어 '치뗌보' 한글로 표기

이곳 간판은 한글로 돼 있다. '까루야바루 국립 초등학교'부터 '까루야바루 시장'까지, 표지판부터 벽화까지 한글이 빼곡하다. '사랑해 당신을!'이라고 한글로 쓴 포토존도 있다.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族)의 최근 풍경이다. 찌아찌아족이 가장 많이 사는 부톤섬 바우바우시(市) 소라올리오 마을에는 '한국 마을'(깜뿡 꼬레아)이 조성돼 학교·시장·버스 정류장에 한글 팻말이 내걸렸고, 사진 촬영용 한복 대여 가게도 생겨났다. 이곳서 10년째 활동 중인 한글 교사 정덕영(58)씨는 "지금껏 배출된 한글 교육생이 2000명 정도"라고 말했다.

◇소수민족의 발음기호가 된 한글

올해는 '한글 1호 진출 사례'인 찌아찌아족의 한글 도입 10주년이다. 말은 있으나 글은 없는 이곳에서 2009년 훈민정음학회 건의로 사업이 시작됐고, 2012년 세종학당이 문을 열었으나 예산 문제 등으로 7개월 만에 철수하는 아픔도 겪었다. 지금은 보육원 1곳과 초등학교 3곳(한글), 고등학교 2곳(한국어)에서 수업이 열리고, 지난해 8월부터 바따우가군(郡)으로도 교육 기회가 확대됐다. 정씨는 "한류 열풍 등으로 한글 인기가 높아졌다"며 "최근 학교 한 곳을 더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조선일보

①찌아찌아족 학생들이 칠판에 한글을 쓰고 있다. ‘까레나 인다우 삐시라무에 붕아붕아 이아 노꼬깜바’는 ‘내가 물을 줘야 꽃들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란 뜻이다. ②한국 동요 ‘과수원길’ 가사를 칠판에 한글로 적은 뒤 노래하는 아이들. ③부톤섬에 조성된 한글마을에 ‘올리엉아이소’라는 한글 팻말이 서있다. ‘올리엉아이소’는 ‘당신이 보고 싶어요’를 뜻한다.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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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 민족이 500개 가까운 언어를 구사하는 인도네시아는 표기를 위해 고대 인도문자·로마자·아랍문자 등을 활용한다. 이 중 한글의 가장 큰 장점은 현지어 발음을 거의 정확히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 특유의 'β'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지금은 사라진 훈민정음 유성자음 '순경음 비읍(ㅸ)'도 발음기호로 도입했다. 찌아찌아족을 위한 한글 교과서를 집필한 서울대 언어학과 이호영 교수는 "한글은 소리를 기호화한 표음문자라 타 민족의 말을 옮겨 적기가 쉽다"며 "찌아찌아어 음절 구조가 한글과 통하는 점이 많고 'ㅏㅑㅜㅠㅘㅝ' 등의 모음도 다양해 적용이 편리하다"고 했다. 이곳 현지인 영어 교사 아비딘(42)씨도 한글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이 교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두(語頭)자음군 표기 문제 등이 나타나 지난해 아비딘과 함께 서울에서 표기법 개정안 작업을 진행했다"며 "조만간 새 교과서와 '찌아찌아 한글 사전'도 완성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피그미족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작업도 최근 완료됐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활동하는 최관신 선교사는 "피그미족은 고유 언어인 '치뗌보'('코끼리어'라는 뜻)를 갖고 있지만 문자가 없어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며 "치뗌보를 한글 자모로 표기하는 안건이 2016년 동부 사우스키부주(州) 의회를 통과했다"고 했다. 소강춘(현 국립국어원장) 전주대 국어교육과 교수의 주도로 치뗌보의 한글 표기 체계를 완성했다. 성서의 4복음서를 한글 자모로 표기해 책자로 냈고, 한글 교재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사우스키부주 인구 600만명 중 치뗌보를 사용하는 인구는 100만명 정도. 최 선교사는 "내년 1월부터 우선 초등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한글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소 원장은 "치뗌보에는 우리가 쓰지 않는 이중모음과 어두자음군이 있어 기존 한글 자모로 표기가 안 되는 건 새로 부호를 만들었다"며 "실제 보급돼 쓰이기 시작하면 개정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현지의 정치·문화·경제 조건 맞아야

다만 "문자 없는 미개한 지역에 한글을 수출했다"는 식의 접근은 곤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2015년 서울대 연구팀은 남미 볼리비아 아이마라족이 쓰는 아이마라어(語)를 위한 한글 표기법을 개발했다. 당시 연구를 진행한 권재일 한글학회장은 "문법이 우리와 구조적으로 비슷해 학술 연구를 진행했고, 이후 고유 문자가 없는 그들에게 한글을 보급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연구 결과와 대응 문자표를 제공하고 현지 휴대전화 자판에 한글을 담는 방안 등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권 회장은 "문자 보급은 글자만 우수하다고 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지역의 정치·문화·경제적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하다"고 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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