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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미쉐린 가이드’ 별을 줄게, 돈을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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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쉐린 가이드>, ‘전직 암행 평가단이 컨설팅 제안’ 폭로에 대해 “사실무근” 강조

한겨레21

11월14일 <미쉐린 가이드 2020> 서울 편 발간 행사에서 ‘별’ 3개를 받은 신라호텔의 ‘라연’과 ‘가온’의 요리사들이 그웬달 풀레네크 <미쉐린 가이드> 인터내셔널 디렉터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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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계획은 전혀 없다. <미쉐린 가이드>와 관련해 여러 가지 토픽이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서울은 미식 산업이 붐인 시장이다. 미식이 번성하는 도시에서 철수하는 건 후회할 일이다.”

올해 외식업계에선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서 <미쉐린 가이드>(이하 <미쉐린>) 쪽이 철수를 고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유인즉슨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 견줘 한국은 유독 분란(?)이 많아 골치 아프다는 것이었다.

미쉐린 “퇴사하면 우리와 관련 없는 이들”



어쨌든 지난 11월14일 <미쉐린 가이드 2020> 서울편 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그웬달 풀레네크 <미쉐린> 인터내셔널 디렉터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예년과 달랐다. <미쉐린> 첫 번째 에디션이 발간됐던 2016년 행사장은 그야말로 거창한 연회장이었다. 음식문화 기자뿐만 아니라 산업, 유통을 담당하는 기자까지 합쳐 1천여 명이 모였다. 당시 현장을 찾은 기자는 <미쉐린>의 위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식당에 그저 ‘별’ 몇 개 주는 게 고작인, 더구나 인공지능 시대에 타이어 제조 회사가 주최하는 행사에 그렇게 많은 한국 기자가 몰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시 기자는 ‘박근혜 정부가 수십억원을 지원했다는 설’에 대해서도 물었다. “사실무근”이라는 짧은 답만 들었을 뿐 관련 논란은 현장에서 바로 묻혔다. 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 ‘<미쉐린> 돈거래’와 관련한 한국방송 보도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결국 행사 뒤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미쉐린>은 120년 전부터 ‘미쉐린타이어’가 자동차 이용자를 위해 발간한 식당 평가서다. 여행 위주 정보를 담은 ‘그린가이드’와 식당을 추천하는 ‘레드가이드’로 나뉘는데, 최근 이슈가 된 것은 레드가이드다. 암행평가단(인스펙터)은 맛과 서비스를 평가해 별 1개(요리가 훌륭한 식당), 별 2개(요리가 훌륭해 갈 만한 식당), 별 3개(요리가 매우 훌륭해 기꺼이 갈 만한 가치가 있는 식당)를 부여한다. 가성비 높은 대중식당은 ‘빕 구르망’ 목록에 올린다. 일단 별점을 받으면 몇 달간 예약이 힘들 정도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다고 알려졌다. 서울은 전세계 28번째 레드가이드가 발간된 도시다. 현재 <미쉐린> 발간 국가는 31곳이다.

<미쉐린>은 어느 나라에서든 발간 때마다 여러 루머가 돌았다. 한국은 첫 에디션이 나온 2016년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다. 당시 파인다이닝(고급 정찬) 레스토랑 셰프들은 ‘인스펙터’에 관한 여러 증언을 기자에게 쏟아냈다. 한 셰프는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홍콩에 기반을 둔 전직 인스펙터들이 컨설팅 제안을 하고 다니는데, 심사 기준을 아는 그들에게 컨설팅을 받으면 아무래도 별 받기가 유리할 것이다.” 실제 여러 셰프가 그들의 컨설팅 제안을 받았다. 거절한 셰프도 여럿이다.

이 부분에 대해 <미쉐린> 관계자는 “퇴사한 이들이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퇴사하면 우리와는 관련 없는 이들이다”라고 답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방송 출연도 자주 하는 유명 요리사도 별을 따기 위해 컨설팅을 받은 뒤 집기와 인테리어 등을 다 바꿨다는 얘기도 들렸다.

브랜드 훼손했는데 법적 조처 계획 없다?



인스펙터에 대한 소문은 개인 업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한 특급호텔 관계자는 “2017년께 이미 이번 보도에 거론된 어니스트 싱어라는 미국인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호텔에 자주 숙박했는데, 당시 레스토랑 두 곳이 컨설팅을 받았다. 돈을 내지 않아서인지는 모르나 별은 못 받았다. 그는 호텔 식음료 파트장에게 바로 연락하기도 해, 마케팅 부서 등에서 나중에 알고는 난감해하기도 했다”며 “별점을 받으면 좋겠지만, 굳이 몇억원을 들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런 현장의 목소리가 결국 한국방송 보도로 증명된 셈이다. 고급 한식 레스토랑 ‘윤가명가’의 윤경숙 대표는 한국방송에 “미쉐린 별 뒤에는 돈 결탁이, 저런 것들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윤 대표에 따르면, 윤씨 언니가 운영하는 도쿄윤가에 개업 석 달 뒤인 2013년 8월 <미쉐린>의 알랭 프레미오와 싱어 등이 방문했다. 도쿄윤가는 그해 기적처럼 별 2개를 받았다. 윤 대표는 도쿄윤가의 소개로 싱어로부터 컨설팅을 받아 수억원을 투자했지만 결국 별점을 받지 못했다. <미쉐린> 쪽은 프레미오가 실제 <미쉐린>의 아시아 총괄 인스펙터였고, 2016년께 퇴사했다고 밝혔다.

이런 보도에 그웬달 풀레네크 인터내셔널 디렉터는 “그 두 명(어니스트 싱어와 윤가명가 컨설팅 계약자인 데니 입)은 직원인 적이 없고, 계약관계를 맺은 적도 없다. 심사에 어떤 금전적 거래도 없다”며 “내사를 진행했지만 의혹을 증명할 만한 점은 못 찾았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법적 조처를 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도 했다. 이미 그들이 권위와 브랜드 가치를 훼손했는데, 글로벌 기업이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답변은 다소 뜨악했다.

요리 경력 30년인 어윤권 셰프는 11월15일 <미쉐린>을 모욕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어 셰프는 “아예 등재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름이 올라갔다”며 “불쾌해서 소송에 나섰다”고 말했다. 지난해 그는 전자우편 등을 통해 심사 기준과 방법 등을 명확히 공개하라고 요구하면서 등재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미쉐린> 관련 논란은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2003년 프랑스 요리사 베르나르 루아조가 ‘별 3개’에서 ‘별 2개’로 강등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가 하면 2016년 <미쉐린> 상하이 편에 등재된 타이안먼(泰安門)은 별점을 받은 뒤 무허가 식당인 게 들통나 문을 닫았다. 인스펙터들의 검증을 마냥 신뢰할 수 없는 이유다. ‘별’을 거부하는 요리사 역시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다. 일본 도쿄의 유명한 스시집 ‘기요다’의 셰프도 거부했다. 서양인들의 시선으로 일식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한겨레21

<미쉐린 가이드 2020> 서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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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을 위한 가이드” “아시아권 잣대 달라”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미쉐린>의 영향력은 외식업계에선 무시 못할 수준이다. 빕 구르망에 오른, 개업한 지 몇 해 안 된 한 식당은 예약이 쏟아졌다. 장사가 안 돼 늘 푸념하던 한 국숫집은 이제 ‘일주일 대기’가 기본이다. ‘별’은 특히 국외 영업에 딱 좋은 문패다. 외국 유명 요리사나 기업 등과 협업한 행사로 수익모델을 창출하는 보증수표가 됐기 때문이다.

<미쉐린>에 꼭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외식업계에선 <미쉐린> 덕에 한식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이 확실히 커졌다고 평한다. 여러 나라에서 <미쉐린> 레스토랑을 다닌 한 미식가는 “<미쉐린>은 자국민을 위한 책이 아니다”라며 “그 나라에 여행 온 외국인을 위한 가이드”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그도 공정성 부분에선 확답을 피했다. “유럽 등의 별 평가와 아시아권은 잣대가 좀 다른 것 같다. 상업적인 이유가 좀 개입하는 듯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 보도와 관련해 억울해하는 ‘오너 셰프’(주인 겸 요리사)도 여럿이다. “부잣집 아들이 고액 과외(컨설팅)를 받았다고 명문대에 다 가는 건 아니지 않나. 컨설팅업체와 <미쉐린>의 연관성은 잘 모르겠다. 물론 (어니스트 싱어 등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별을 받기 위해 몇 년간 엄청나게 노력했다. 대기업이 아닌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나 같은 셰프들마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거 같아 슬프다.” 이들도 이번 사태를 폭로한 윤가명가의 윤경숙 대표처럼 피해자인 셈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예종석 회장은 첫 번째 에디션 발간 때부터 <미쉐린>이 한국에 뿌리내리기 힘들 거라고 예견했다. 예 회장은 “120년 전, 애초 발간 때부터 타이어 소비자를 더 끌어들이려는 상업성을 띤 책자였다”며 “세월이 흘러 권위가 생긴 셈인데,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허름한 맛집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그들의 잣대로 맛을 평가하는 일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미쉐린>은 암행평가를 장점으로 내세우지만, 현장 요리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누구나 금세 인스펙터를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맛집이 있다. 무소불위의 권위가 추앙받는 시대가 아니다.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발달해 정보가 거의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한국에서는 다수가 검증한 정보가 인정받는 추세다.

120년 전 평가 기준을 여전히 들이대는 <미쉐린>은 시대와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 <미쉐린> 쪽은 전세계에 15개 국적의 인스펙터가 있다고만 했을 뿐 몇 명인지 등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미쉐린>보다 더 상업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영국의 레스토랑 평가서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도 심사위원과 채점 방식을 공개하지 않는다. 밀실 평가는 잡음과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소수가 독점하는 평가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들이 개입할 여지도 많다.

집단지성 시대, 소수가 독점하는 평가 ‘한계’



최근 출시된 식당 앱인 <라 리스트>는 전세계 400여 개의 식당 평가서, 인터넷 리뷰, 주요 신문과 잡지, 블로거 등의 평가를 분석하는 알고리즘 방식으로 순위를 계산한다고 한다. 구글 리뷰, 트립어드바이저 등의 평가와 기사도 평가에 들어가는 것이다.

시대는 변했다. 이제 <미쉐린>이 세상에 답할 때가 왔다.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ESC 팀장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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