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모란 사회2팀 기자 |
경기도 화성 출신의 30대 직장인 A씨는 ‘고향’을 물어보면 “수원 근처”라고 대답한다고 했다. “화성”이라고 답했다간 십중팔구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언급해서다. 그는 “‘그런 무서운 동네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화성시가 계속 발전하는데도 ‘연쇄살인’, ‘범죄 도시’라는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A씨의 하소연은 화성시 출신이나 주민은 모두 공감하는 내용이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발생한 10건의 연쇄살인으로 화성은 ‘살인의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기 때문이다. 화성시 대표 브랜드가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연쇄살인’ 이미지는 2001년 화성군(郡)이 화성시(市)로 승격되고 대규모 택지 개발이 진행될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2000년대 초반 화성시의회가 화성시 이름 변경을 추진했을 정도다.
이후 화성시는 ‘안전한 도시’를 내세우며 지역 곳곳에 방범용 폐쇄회로 TV(CCTV)를 설치했다. 2008년 4월엔 화성서부경찰서가 문을 열었고 화성 동탄 1~6동과 병점동 등 12개 행정동을 담당하는 화성동탄경찰서도 지난해 12월 생겼다.
사라지던 불씨를 되살린 건 지난 9월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되면서다. 경찰은 이춘재의 DNA가 검출된 3차·4차·5차·7차·9차 등 5개 사건의 강간살인 혐의로 이춘재를 피의자로 입건했다.
이춘재의 범행이 알려지면서 화성시는 다시 술렁였다. “범인이 드디어 잡혔다”며 안도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화성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커지고 있다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주민이 더 많다고 한다. “죄는 이춘재가 저질렀는데 애먼 화성시민이 피해를 본다”는 불만이다.
이에 화성시의회는 최근 ‘화성 연쇄살인 사건’ 명칭을 ‘이춘재 살인사건’으로 변경해달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시의회는 결의문에서 “진범이 밝혀졌지만, 사건명에 ‘화성’이라는 지명이 붙여져 30여년간 오명을 짊어지고 있다”며 “경찰과 각 언론사는 화성시민 전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명칭을 ‘이춘재 살인사건’으로 변경하라”고 요구했다.
사건 명칭에 지명이 들어간 것은 ‘변사체(變死體)가 발견된 장소를 관할하는 경찰서에서 사건을 처리한다’는 경찰 자체 규정 때문이다. 사건에 지명이 언급되면 주민에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순기능도 있긴 하다. 하지만 자꾸 회자하면 지역 이미지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 지자체는 화성시처럼 “사건 이름에서 지역명을 빼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범인이 붙잡히면 사건명을 범인의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경기도 수원·화성·군포 등에서 발생한 부녀자 7명에 대한 납치·실종 사건은 2009년 1월 이 사건의 피의자 강호순이 검거되면서 ‘강호순 사건’이 됐다.
화성 시민들은 30여년을 살인의 추억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춘재가 연쇄살인 사건 범행을 자백한 만큼 이젠 ‘이춘재 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최모란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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