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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메이저 오페라단, 그곳에 우뚝 선 한국인 마에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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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상]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첫 여성 음악감독 오른 김은선

'뉴욕 메트' 다음가는 오페라단, 2021년 8월부터 5년간 이끌기로

NYT "그는 역사를 만들고 있다"

"첫 여성 음악감독 자랑스럽지만 언젠간 그냥 '지휘자'로 불렸으면"

자그마한 몸집의 한국인 여성 지휘자가 미국 오페라의 역사를 새로 썼다. 지휘자 김은선(39)이 5일(현지 시각) 96년 역사를 지닌 샌프란시스코 오페라(SFO)의 첫 여성 음악감독으로 임명됐다. 1923년 창단한 SFO는 미국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다음으로 큰 세계적 오페라단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SFO처럼 중요한 메이저 오페라단의 수장이 된 여성 지휘자는 김은선이 유일하다. 그는 역사를 만들고 있다(She's Making History)"고 대서특필했다. SFO 현지 기자회견이 끝난 뒤 전화를 받은 김은선은 "오랫동안 마음 놓고 몸 누일 '집'이 생겨서 기쁠 뿐"이라며 "여행용 트렁크 3개에 사계절 옷과 악보를 싸들고 365일 호텔을 전전하며 객원으로 지휘해왔는데, 이젠 하나의 오케스트라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행복하다"고 말했다. 임기는 2021년 8월부터 5년. 당장 내년 시즌에 SFO와 함께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를 선보인다. 매슈 실박 SFO 총감독은 "김은선은 두 팔 벌려 단원들을 껴안고 가장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지휘자"라고 했다.

지휘자 김은선의 성장은 서른다섯에 파리 바스티유 극장 음악감독이 된 정명훈에 버금간다. 남성들 입김 센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 지휘자가 드물어 더욱 값지다. 30대에 베를린 국립오페라와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등 독일을 대표하는 극장에 두루 선 한국 지휘자는 그녀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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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생머리를 질끈 묶고 지휘를 하고 있는 김은선. 그는 “지난 6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 ‘루살카’를 지휘하러 왔을 때부터 음악감독 임명 논의를 시작했지만 오페라단이 ‘서프라이즈’로 밝힐 때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며 웃었다. /Ugo Po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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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작곡과를 거쳐 같은 대학원 지휘과에서 최승한 교수에게 배웠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에 재학 중이던 2008년 스페인 지휘자 헤수스 로페즈코보스가 여는 오페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마드리드 왕립극장에 여성 최초로 섰다. 그의 지휘는 악보의 행간까지 파고들며 음악가들을 한데 아우른다. 레퍼토리 폭도 넓다.

치열한 정글에서 '마에스트라(여성 지휘자의 경칭)'로 우뚝 선 비결은 '실력'이었다. 학자가 논문 읽듯 악보를 탐구했다. 틈날 때마다 다른 지휘자의 연주를 보러 다니며 '저 사람의 좋은 점을 나는 갖고 있나' 반성했다. 2010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오디션을 봤을 때 명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해준 "너처럼 재능이 뛰어나지만 경험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많이 봐야 한다"는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베를린 필 수장이 된 키릴 페트렌코에게선 음표 하나도 완벽하게 움켜잡는 집요함을 배웠다. "첫 리허설 때 '동양인? 여자네?' 하며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단원이 대부분이었죠. 늦게 온 바이올린 주자인 줄 알았다가 제가 지휘대로 가서 악장한테 손 내밀면 '얜 뭐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려요. 그러나 불과 1~2분 만에 '마법'이 일어나죠(웃음)."

어느 악단을 가든 그 나라 말로 대화하려고 영어·독일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를 터득했다. 하루 네 시간 자면서 포스트잇에 단어를 깨알같이 써놓고 달달 외웠다. 물론 "가장 잘하고 싶은 언어는 '음악'"이다. "지휘자는 작곡가의 대변인. 연인의 말을 알아들어야 그의 속마음을 짚을 수 있죠." 실력은 또 다른 문을 열어줬다. 지난달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에서 '마술피리'를 지휘한 그는 LA 오페라와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 데뷔할 예정이고, 2021년엔 꿈의 무대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라 보엠'을 지휘한다. 지금까지 메트에서 지휘한 여성은 다섯 명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김성재 전 문화부 장관이다. 7년 전 100세를 일기로 눈감은 외할머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부인과 '여의사'였다. "이젠 아무도 성별을 구분하지 않죠. 그냥 '의사'라고 해요." 김은선은 "'첫 여성 음악감독'이란 게 자랑스럽지만 나도 언젠간 그냥 '지휘자'라고 불릴 날을 기다린다"고 했다. "갈림길에서 망설일 때 '큰 무대로 가라'고 등 떠밀어주신 할머니 말씀을 잊을 수 없어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입니다."

[김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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