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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은 우리에게 맡기고, 미·소 군대는 함께 떠나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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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24) 미국과 소련군 철수론

1947년 2차 미소공위 교착에

민족분열 현실화 우려 커져

미소 분할점령 비판론도 상승

미, 남한 단독정부 구상하면서

9월에 한국문제 유엔에 상정

여론 주도층은 미 계획 반대

‘미소 공동 철수’ 찬성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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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바로 아래 개성에 사는 백양기라는 청년이 1947년 9월1일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미농지 두 장에다 청년답게 활발한 필체로 써내려간 이 편지는 ‘경애하는 웨데마이어 장군 각하!’를 몇 번씩 되풀이하면서 그에 대한 감사와 조선인들이 그에게 갖는 기대를 피력한다. 편지의 주요 부분을 소개한다.

“경애하는 웨데마이어 장군 각하! 조선인민은 어디까지나 불행한 민족인가 봅니다. 이 좁은 조선 땅이 비극적 기현상인 38선으로 양분됨에 따라 참으로 눈물겨운 참사를 모든 인민은 뼈아프게 체험하였고 질서 없는 과도기적 사회, 극도로 혼란된 경제상태는 온 인민을 낙망과 눈물의 생활로 여지없이 몰아넣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민은 도탄 속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남북이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하루속히 이루기를’

일시적 고식책으로 남조선만이라도 정부를 선다 함은 부득이한 조치로도 생각되오나 우리 조선인민은 2년간의 짧은 경험만으로도 양분되어 존립할 수 없음을 뼈아프게 느껴왔습니다. 경애하는 웨데마이어 장군 각하. 그러나 북조선에선 소련적 체계하에 확고한 체제를 수립하려 힘쓰며 남조선 역시 미국적 체계하에 확고한 체제가 있기를 노력함은 명백한 사실일 겁니다. 그러면 미소 양군이 주둔하여 있는 이상 그 대립적 체제는 더욱 강력하여 가며 그에 따르는 민족적 분열도 극심하여 갈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이 사실을 목격하고 있는 바입니다. 지금 모든 인민은 최대의 불안과 우려에 빠져 최후적으로 기적적 서광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경애하는 장군 각하.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하여 모스크바 삼상 결정을 신속히 강력한 조직하에 추진이 있기를 모든 인민은 갈망하며 이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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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파만 남한 단독정부 지지



편지지 중앙에 ‘공립국민학교’가 빨간색 활자로 찍힌 것으로 보아 그는 초등학교 교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미소 양군이 주둔하여 있는 이상 남과 북의 대립적 체제가 더 강력해지고, 그에 따르는 민족 분열도 극심해질 것이라는 현실인식 위에서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통일된 자주독립국가 수립이 그를 포함한 모든 조선 인민의 한결같은 소원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한다.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보낸 편지들 가운데 극우파가 보낸 편지들은 신탁통치 반대와 총선거를 통한 사실상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좌파와 중도파의 편지들은 미소공위 성공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했지만 백양기는 그 실현을 ‘최후적이고 기적적인 서광’으로 표현할 정도로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 믿음을 잃어가고 있고, 그만큼 절박하다.

1947년 8월 중순 이후 협의 대상 정당·사회단체 문제로 미소공위가 재차 난항에 빠지자 한국 사회에 민족 분열의 위기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시종일관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호소하고 있지만 그의 편지에서는 미소공위가 성사되지 않으면 민족 분열을 막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그대로 묻어난다.

민중동맹이라는 중간파 계열의 단체가 웨더마이어에게 보낸 편지는 미소 양국이 협의 대상 문제로 미소공위 협상이 정체되었다고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그러한 태도는 한국인을 더욱 실망시킬 뿐이며 그 진의를 의심하게 만든다고 내뱉는다. 편지는 ‘이른바 반탁이니 찬탁이니 하는 것도 비굴한 극우파와 좌파가 대중들을 흥분시키고 선동하여 그들을 자기네 노선으로 유인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하다’며 ‘조선인이라면 그 누구도 반탁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나, 신탁통치 반대가 모스크바 결정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민중동맹은 원세훈의 영향하에 있었고, 미군정은 이 단체를 중도우파로 분류했지만 구성원의 다수는 보수적인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점령군 당국은 한국인들 내부의 좌우대립과 찬·반탁 투쟁으로 모스크바 삼상 결정이 이행되지 못하는 것처럼 몰아갔지만 위의 편지들은 어느 것이나 한국인들의 고통과 불행의 근원이 미소의 분할점령과 양국의 패권경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상황인식은 당시 양식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평론가 오기영은 그 점을 역사적으로 반추하며 1946년 10월 한 잡지에다 점령군의 두 수장인 하지 장군과 치스차코프 장군에게 양군 철퇴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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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친선은 조선을 놓아주는 것”



“사십년 전에 노서아는 39도 이북의 세력을 주장하다가 패전에 의하여 많은 권익을 잃었고 오늘날 일본의 패망에 의하여 포츠머스 조약의 무효와 함께 그때 빼앗긴 모든 권익의 회복과 아울러 38도선이 생겼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사십년 전 제정 노서아의 극동정책과 현재의 소련 극동정책이 근본에 있어서 전자는 침략이요 후자는 해방인 것을 믿기는 하면서도 어디엔가 공통되는 그 무엇이 섞여 있지나 않나 하는 의구를 가지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는 일본을 위하여 조선의 멸망을 시인하고 이제는 또 38도선을 규정하였다는 것은 도대체 사십년 전이나 사십년 후나 그 안중에는 정작 조선 땅의 주인은 없는 것이 아닌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소련이나 미국이나 우리에게 오직 해방의 은의(恩義)만을 남기고 이런 의구를 일소하는 것은 간단하고 용이한 일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두 군대가 다 하루속히 물러가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하는 해방자를 환영하였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독립까지 당신네의 군대 주둔하에, 말하자면 양군의 무력대치하에서가 아니면 아니될 이유는 추호도 없습니다. 양군이 진주하던 그때는 아직 일본의 무력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던 때요 또 너무 파리하였던 민중이 마음으로만 가득할 뿐으로서 환영조차 변변히 못하였던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마는 이제 양군이 철퇴(撤退)할 때는 우리는 우리 맘껏 성의를 다하여 환송할 것입니다. 독립은 우리끼리의 통일에 맡기고 물러가 주면 우리는 우리의 자각에 의하여 좌우의 등 뒤에 있는 무력의 눈치를 살필 것 없이 완수할 수 있습니다. 하건마는 양국은 모두 조선의 독립을 보고야 갈 것을 기회 있는 때마다 성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피차 상대방이 물러가지 아니하니 혼자만 물러갈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에드거 스노는 “양국의 군대가 과연 철퇴할 의사가 있는지를 의심하며 조선이 영구히 분할 점령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의 은근한 걱정을 솔직히 대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국의 군대를 향하여 똑같이 간절하게 희망하는 것은 그만 조선을 놓아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해방이요 진정한 원조요 진정한 친선인 것을 강조하는 바입니다.”(<민족의 비원>)

이 공개서한이 발표된 1946년 10월만 해도 미소 어느 나라나 군대 철수를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않았고, 한국 사회도 38선 이남이나 이북이나 점령군 철수 문제를 현안으로 삼을 여건과 상황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 여름이 저물어갈 무렵이 되자 양군 철수 문제가 미국과 소련은 물론 한국 사회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만 해도 한국인들은 점령군을 해방의 은인으로 환영했으나 2년의 점령 기간은 오기영의 표현대로 그 은혜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또 그 점령이 남과 북에 초래한 현실의 변화가 양국 군대의 철수를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으로 만들었다.

제2차 미소공위가 정체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9월 중순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미국의 행동은 소련은 물론 영국과 중국의 동의도 받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고, 소련은 미국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9월26일 양군 동시철병 후 조선인에 의한 한국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역으로 제안했다. 어느 방안이나 모스크바 삼상 결정이라는 국제공약을 사실상 파기하는 것이었고, 점령의 종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제 미소 어느 쪽이나 자국 군대의 점령을 대신할 현실적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오기영은 양군 철퇴를 한국인들이 맘껏 성의를 다해 환송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남한 사회의 경우 어느 방안에 의지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느냐에 따라 각 정치세력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 자명했으므로 양측의 서로 다른 방안은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응을 초래했고, 두 가지 방안을 둘러싸고 남한 사회가 요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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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총선거 반대가 60%


상반된 두 가지 처리방안에 대한 남한 사회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 그 전에 먼저 미국 쪽 방안이 사실상 전제하고 있는 총선거를 통한 남조선 단정 수립 방안에 대한 여론부터 살펴보자. 한국여론협회가 1947년 9월11일 서울시내 정당·사회단체, 관공서, 언론계, 교육계, 산업계 기타에 걸쳐서 저명인사 624명을 대상으로 ‘남조선 단독정부 과정으로 향하고 있는 총선거는 단연히 중지해야 한다’는 백범 김구의 주장에 대해 찬반 의견을 물었다. 조사 결과는 반대 137명(22%), 찬성 187명(30%), 조건부 찬성 175명(28%), 회답 포기 125명(20%)이었다. 각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던 만큼 여론주도층의 견해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는데 남한 총선거 반대 여론이 60%에 가까웠고, 찬성은 22%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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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여론협회가 약 한달 뒤인 10월17일 서울의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유엔에서 조선문제 성공 가능성, 미소 양군 동시철퇴에 대하여 설문했는데 그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문제가 유엔에서 성공한다고 보느냐는 설문에는 성공한다는 응답이 17%,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응답이 83%였고, 미소 양군의 동시철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설문에는 찬성이 57%, 반대가 43%였다.

이 여론조사는 남한의 여론주도층이 조선문제를 유엔에서 다루자는 미국 쪽 제안의 성사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음을 보여준다. 두 조사 모두 서울 거주자, 그것도 여론주도층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조사 결과를 남한 주민 전체의 여론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으로 어쨌든 급박한 정세 변화를 주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여론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 조선문제의 유엔 이관을 반대한 셈이다. 10월의 여론조사를 9월의 조사와 비교하면 양군 동시철퇴 찬성은 김구의 주장에 대한 찬성과 거의 같고, 조선문제가 유엔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예측은 그 비율이 김구의 주장에 대한 반대와 비슷하다. 총선거를 통한 남한 단정 수립 반대가 양군 동시철퇴 찬성으로 옮아간 것으로 볼 수 있고, 여론주도층의 경우 남북 분리정부 수립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60%에 이르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소련이 양군 동시철퇴를 제안하자마자 바로 ‘우리가 한국에 온 이래로 가장 감내하기 힘든 선전책동이다. 그것은 광범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고,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약소국들의 지지를 더 광범하게 얻어내기 위한 시도’였다고 평했는데, 위의 여론조사 결과는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오랜 기간 남한 정치를 관찰한 뒤 그가 얻은 나름의 혜안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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