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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일터에서 '복합차별' 겪는 탈북여성들…낮은 임금에 성희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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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산학협력단, 인권위 의뢰로 설문·심층면담

"북한이탈주민법에 탈북여성 보호 명시해야"

연합뉴스

채용안내문 살펴보는 구직 탈북여성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2010년 남한에 온 북한이탈여성 A씨는 세무사 사무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취업 전 직업교육을 받아 세무회계 2급과 기업회계 1급 자격증도 땄지만 월급은 다른 직원보다 오히려 적었다.

A씨는 "다른 신입 직원은 초봉이 150만원이었는데 내 첫 월급은 105만원이었다"며 "회사에서는 (내가)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초봉을 이렇게 책정한다고 했다. 북한이탈주민법에 따라 내 급여의 절반은 국가에서 회사에 주는데도 그렇게 받았다"고 말했다.

8일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이화여대 산학협력단이 작성한 '북한이탈여성 일터 내 차별 및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서에 이런 사례들이 포함돼 있다.

조사팀은 인권위로부터 연구용역을 의뢰받아 5월 1일부터 8월 18일까지 직장에서 일하는 탈북여성 100명을 설문조사하고 35명을 심층 면담했다.

보고서는 탈북여성들이 '여성'과 '북한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어 한국사회에서 복합적 차별을 당하고 일터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올 3월 기준 전체 북한이탈주민 3만2천705명 가운데 여성은 2만3천506명으로, 72%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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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최자윤] 일러스트



◇ 탈북자면 무조건 안 뽑아…임금 적게 주기도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구직 단계부터 북한 출신이라는 선입견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

북한에서 교사였다가 2013년에 남한에 온 40대 B씨는 식당에서 일하려고 했으나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B씨는 "식당에서는 '이전에 탈북자를 고용했더니 말투가 억세서 손님들이 거부감을 느꼈고, 다른 직원들과도 잘 못 지내 채용할 수 없다'고 했다"며 "차라리 조선족이라고 했으면 채용됐을 것 같다"고 말했다.

17살이던 2006년 부모님과 함께 한국에 온 C씨는 한국에서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마쳤다.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병원 면접을 봤지만, 탈북민이라고 밝히자 병원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C씨는 "면접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채용 공고가 계속 떠 있어 전화해 물어보니, '다시 이력서를 들고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처음 면접을 진행했던 병원 실장이 C씨가 탈북자인 점이 마음에 안 들어 뽑지 않으려 했는데, 다음번에는 원장이 직접 면접을 진행해 C씨를 채용키로 한 것이었다.

일자리를 찾은 후에도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각종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37%가 직장에서 차별이나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들 중 3분의 2는 자신이 북한이탈주민이어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2008년 남한에 와서 학교에서 일하는 50대 D씨는 남북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북한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경험을 털어놨다.

D씨는 "남북한 경기가 있으면 직장에서 어디를 응원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며 "북한 뉴스만 나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김정일 봤냐'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탈북여성들은 직장 동료들로부터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북한 정보가 사실이냐'라는 질문을 받거나, 상사로부터 "북한 말투를 고치라"고 요구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직장 동료나 상사와 다툼이 생기면 '북한 출신이어서 어울리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 일도 있다고 한다.

◇ 임금 차별에 성희롱까지…"괴롭힘당해도 혼자 참는다" 41%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임금차별을 겪는 여성들도 드물지 않다.

2012년 입국한 30대 E씨는 남한에서 전산회계 1급과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중국어 회화 자격증, 생산정보시스템 자격증 등을 땄다. 자격증을 가지고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회사를 찾아가는 족족 "한국에서 일해본 경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월급을 공고에 나온 금액보다 40만∼60만원 적게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E씨는 "일단 몇 개월만 적게 받으며 일하라고 하기에 다른 사람은 연봉이 2천400만원일 때 나는 2천200만원만 받고 일했다"며 "통역 업무까지 했는데도 연봉은 오르지 않아 탈북민이라 차별받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남북하나재단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북한이탈주민의 월평균 임금은 189만9천원으로, 전체 평균보다 65만9천원 적었다.

성희롱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2010년 입국한 한 40대 여성은 직장 상사에게 자주 '몸매'에 대한 평가를 당했다고 했고, 또 다른 탈북 여성은 직장 회식 때 상사로부터 "같이 블루스를 추자"고 강요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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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연합뉴스TV 제공]



스크린골프장에서 일하던 한 여성은 친절하게 대해주던 손님이 퇴근 후 밥을 먹자고 해 따라나섰다가 "애인하면 안 되겠냐"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 손님을 피하다 보니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응답자 중 41%는 차별과 괴롭힘을 당해도 '혼자서 참는 방식으로 대처한다'고 했다. "북한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47%가 '상대방과 대화해 해결', 25%는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도움 요청'을 답변으로 골랐다.

조사팀은 탈북여성들이 직장에서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태조사를 주도한 김석향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탈여성은 북한 출신이면서 동시에 여성이라는 취약성으로 일터에서 복합차별의 대상이 된다"며 "북한이탈주민법에 북한이탈여성 보호를 명시하고, 개별 조문에서도 더욱 견고한 인권보장과 보호 규정을 명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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