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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구정은의 '수상한 GPS']성폭행·살해범 사살…'정의의 실현'인가 '권력 남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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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성폭행·살해사건을 저지른 범인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피해자는 목숨을 잃었고 유족들은 고통에 시달리는데 법의 단죄는 멀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른 자들이 경찰에 사살됐다. 한쪽에선 ‘정의가 실현됐다’며 환호하고, 한쪽에선 경찰의 ‘판결 없는 즉결처형’에 우려를 보낸다.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재판 중 살해된 여성

지난달 27일 하이데라바드에서 27살 여성 수의사가 집단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데 이어, 또 다른 23세 여성이 우타르프라데시주 운나오에서 성폭행범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 여성은 2018년말 성폭행범들을 고소했고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기소된 남성 중 한 명은 법원의 보석 결정으로 풀려난 뒤 피해자를 협박해왔다. 범죄자를 자유롭게 풀어줘서는 안 된다고 피해자 측이 항변했으나 법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여성은 법원에 갔다 오는 길에 성폭행범들을 포함한 남성 5명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남성들은 여성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전신 화상을 입은 여성은 병원에 실려갔으나 6일 끝내 사망했다. 하이데라바드 사건에 이어 또 일어난 잔혹범죄에, 여러 도시들에서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항의시위를 벌였다. 야당인 국민회의의 라훌 간디 대표는 7일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겨냥해, 여성 대상 범죄에 적극 대응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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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운나오에서 성폭행 가해자에게 살해된 23세 여성의 가족들과 이웃들이 모여 7일 사법당국에 항의하고 있다. 이 여성은 재판 도중 보석으로 풀려난 가해자의 공격으로 전신 화상을 입고 6일 숨을 거뒀다.  운나오 |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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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델리의 버스 안에서 여대생이 잔인하게 성폭행당하고 숨진 뒤에도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들이었다. 세계에 충격을 준 델리 사건 뒤에 인도에서는 성폭행 신고가 늘었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2012년 신고된 성폭행이 2만5000건이었는데 2016년에는 3만8000건으로 늘었다. 2017년에는 3만2500여건이었다. 하지만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32% 뿐이었다. 특히 판결이 나오지 않은 채 밀려 있는 사건들이 2017년말 기준으로 12만7800건에 이른다. 지난해 정부가 성폭행 사건들을 전담할 ‘패스트트랙 법원’ 1000곳을 개설하겠다고 했으나 여전히 법은 느리기만 하다.

경찰에 사살된 용의자들

사법당국이 시간을 끄는 사이에 피해자와 증인들은 가해자 측의 압박을 심하게 받게 되고, 재판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성폭행범이 ‘유력자’이거나 인맥이 많은 사람이면 피해자들의 법정 투쟁은 산 넘어 산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성폭행·성학대 혐의로 기소된 ‘영적 지도자’ 아사람 바푸 사건이 그런 예였다. 종교적 공동체인 아슈람들을 만들어 인도는 물론이고 세계에 수백만 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린 아사람은 2013년 기소됐지만 지난해에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느리고 구멍 많은 사법제도를 향한 비난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하이데라바드 수의사 성폭행·살해범 4명이 도주하려다 6일 경찰에 사살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체포된 뒤 범죄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이들이 붙잡혀온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경찰서 밖에는 주민 수백 명이 몰려들어 ‘린치’를 요구했다. 그런데 용의자들은 현장검증 도중에 도망을 쳤고, 추격하던 경찰이 방갈로르 외곽에서 모두 사살했다.

인디안익스프레스에 따르면 이들의 사살을 지휘한 경찰은 과거에도 비슷한 사건들에 연루된 적 있었다. 인도는 성폭행·살해뿐 아니라 여성들을 겨냥한 ‘염산·황산테러’도 종종 일어난다. 청혼을 거부한 여성, 맘에 안 드는 여성을 화학물질로 공격해 살해하거나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하이데라바드 사건을 맡았던 경찰 지휘관은 2008년 염산테러범 3명을 추격 도중 사살하는 등, 과거에도 두 차례 도주 중인 범죄용의자들을 사살한 전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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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뉴델리에서 7일 여성들이 검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여성들을 겨냥한 폭력과 성범죄에 눈감은 사법당국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뉴델리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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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들이 사살되자 대중들은 악당을 응징한 경찰이라며 환호했다. 경찰서 앞에 주민 2000여명이 모여 꽃다발을 뿌리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몇몇 정치인들과 유명인들도 소셜미디어에서 경찰을 옹호했다.

정의로운 응징인가, 초법적 처형인가

하지만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들은 “초법적인 처형”이라며 사건 조사를 요구했다. “경찰이 판결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대중들이 용인한다면 그걸 막을 방법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NHRC)도 경찰의 행위가 “사회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성명을 냈다. 사살된 용의자의 17살 아내는 임신한 상태로 언론에 나와 “나도 죽여달라”며 울부짖었다. 또 다른 용의자의 아버지는 “법적 절차도 없이 냉혹하게 살해했다”고 비난했다.

알자지라방송은 “정의를 구현하는 법적 절차에 대해 논의하는 것에서, ‘무슨 방법으로든’ 정의가 실현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쪽으로 여론이 이동해가고 있다는 것은 경계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처참하게 숨진 수의사의 아버지는 “정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파장이 커지자 샤라드 아르빈드 보브데 대법원장은 사법 절차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정의가 복수의 형태로 실현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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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여성운동가들과 시민들이 7일 뉴델리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비난하는 시위를 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뉴델리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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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보석으로 풀려나온 가해자에게 살해된 운나오 사건이 벌어졌다. 숨진 여성은 법을 통해 정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가족들의 만류 속에서도 1년 동안 혼자 힘으로 외로운 싸움을 해왔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하지만 법은 그를 배신한 셈이 됐다.

방화살해 용의자 5명은 모두 체포됐으나, 기나긴 절차가 따르는 재판 대신에 ‘정의로운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숨진 여성의 오빠는 “저들(가해자들)도 동생이 간 곳(죽음)으로 가게 되어 정의가 이뤄지길 동생도 바랄 것”이라고 했다. 유족들과 시민들은 “살인자들을 모두 당장 매달던가 경찰이 쏴죽여야 한다” 외치고 있다.

이 사건뿐이 아니다. 동북부 트리푸라주의 샨티르바자르에서도 17세 여성이 끌려가 집단성폭행을 당한 뒤 방화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7일 이 소녀가 숨지자 범인들 집과 경찰서 앞에 주민들이 몰려들어 항의하며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고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전했다.

구정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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