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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순의 기억전쟁] 아버지는 동쪽으로 아들은 서쪽으로... 생과 사가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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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홍·고처옥 부자의 한라산 도주기

1948년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전 산내에서 불법 처형되었습니다. 이들의 사연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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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평화공원에 전시된 4.3희생자들의 사진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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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탕." "악." "철민이 아버지가 총에 맞았어." "얼른 뛰어."

한라산 중턱에 있던 이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뛰었다. 고영홍과 고처옥도 무조건 뛰었다. 살림이랄 것도 없지만, 밥그릇, 수저, 옷가지 등을 챙길 시간도 없이 뛰기에 바빴다.

30분이나 달렸을까, 갈림길이 나왔다. "처옥아, 함께 달리다간 둘 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너는 저쪽으로 가거라."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동쪽으로, 아들은 서쪽으로 나뉘어졌다. 갈림길에서 단순히 방향만을 나뉘어 뛰었을 뿐인데, 그것이 생과 사, 운명의 갈림길이 될 줄은 당시에 고영홍 부자 누구도 몰랐다. 1948년의 일이었다.

이후 아버지 고영홍은 토벌대에 잡혀 주정공장에 구금됐다가, 7년형을 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국민보도연맹원 들과 함께 대전 산내에서 불법 처형되었다.

아들 고처옥은 토벌대의 검거를 피해 산중생활을 더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3개월 동안 더 한라산 생활을 했지만 군경의 토벌작전은 집요했다. 결국 고처옥도 1949년 3월 귀순하게 되었고, 단추공장에서 4개월 수용되었다. 수용소 생활이 끝났다고 자유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재건부락'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 그를 포함한 주민들 모두가 부역에 동원되어 제주도 서귀포군 남원면 의귀리 중앙동에 성을 쌓았다. 산사람들의 공격을 피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주민들은 생업도 포기하고 수개월간 부역에 무상으로 동원되어야 했다. 성을 쌓은 후에는 보초를 서야 했다. 그런 후에는 인근 산남리, 수망리, 선화동에 성을 쌓는 데 다시 동원되었다. 그렇게 귀순한 지 1년 만에야 강제부역에서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방화에 항의했다고 학살

군경토벌대가 제주도 서귀포군 남원면 의귀리 선화동에 들이닥쳤다. 지휘자가 명령을 내렸다. "모두 불 질러 버려."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초가집에 불을 붙였다. 초가집이 불에 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군인들은 삼삼오오 이웃집으로 향했고, 집안에 있던 가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군인들이 고광호 집에 불을 붙이는데 집주인이 항의했다. "집을 불 지르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이러시오?" "이런 빨갱이 새끼, 시끄러워" 하며 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의귀리 선화동에서 군인과 경찰들이 전체 가옥 30호를 불 지르는데, 이들에게 항의한 경우는 고광호 집이 유일했다.

군 지휘자는 자신들의 토벌 작전(?)에 항의하는 사람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의 권위가 서지 않기 때문이다. "야, 그놈들 전부 처리해"라는 장교의 명령에 군인들은 고광호와 그의 아내 김광일, 아들 고영평을 마을 하천 가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다. 어떤 설명이나 절차도 필요하지 않았다. 소나무 숲에 엉거주춤 서있는 이들을 향해 총탄이 사정없이 날아갔다. 나머지 집이 모두 불 타버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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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 고처옥 ⓒ 박만순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남원면 의귀리 중앙동 김민종(가명)씨 집으로 청년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처옥이 왔는가?" "예" 열여섯 살 고처옥은 방에 들어가 마을 형들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오기로 한 젊은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집주인 김민종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토지분배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소. 우리 조선 백성은 지난 500년간 양반계급에 의해 착취당하면서 살아왔소. 지주들로부터 땅을 몰수해 공평히 무상분배를 해야 하오."

"옳소" 소리와 함께 박수소리가 터졌다. "근디, 그게 가능할까요?" 고명철(가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김민종에게 질문했다. "이미 북조선에서는 지난 해(1946년)에 무상몰수 부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완료했소!" "예?" 참석자 모두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우리가 왜정시대에 가장 고통 받은 것이 공출 때문인데, 해방된 지금도 미군정이 공출을 시행하고 있소. 너나없이 평등하게 사는 것이 사회주의요. 남조선에서도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남북조선이 하루속히 하나 되는 사회를 만듭시다."

남로당 남원면 책임자 김민종의 묵직한 목소리는 말 그대로 열변이었다. 참석자들 모두 박수를 치며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어서 남원면 여맹위원장 강순희(가명)가 일어났다.

"지금부터 혁명가요를 배우겠습니다. 모두 따라 부르세요.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굳고 식어갈 동안 핏줄기가 깃발을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 기를 그 밑에서 죽음을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려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1947년 겨울 제주도 서귀포군 남원면 의귀리 중앙동 김민종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고처옥의 증언에 의하면 그 이후에도 김민종 집에서 학습모임이 수차례 열렸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이 사회주의에 물들어 귀국하면서, 해방 후 제주사회는 사회변화의 바람이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좌익진영은 남원초등학교에 모여 수시로 회의도 하고, 경찰들과의 갈등도 잦았다.

이는 비단 서귀포군 남원면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제주 사회 전체의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1947년 3·1절 기념식 때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죽자, 미군정과 친일파경찰에 대한 전도민적인 항쟁이 일어났다. 이것이 1948년 발발한 4.3사건의 시발점이다.

이러한 사회 변혁의 바람에 미군정과 군·경은 탄압 일변도의 정책만을 취했다. 1948년 겨울에 접어들면서 군경 토벌대는 중산간마을(해안으로부터 5km 이상의 지역에 있는 마을)에 소개 명령을 내리면서, 이에 응하지 않는 마을에 대해서는 학살과 방화를 일삼았다. 남원면 의귀리 선화동 마을 방화도 이런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름이 같아 학살

1948년 초겨울 남원면 의귀리에 군경 토벌대의 학살과 방화가 이루어질 때였다. 군경의 눈에 청년들이 보이기만 하면 학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의귀리에 들어 온 토벌대가 무슨 정보를 갖고 왔는지, 사람들의 명단을 불렀다. 그 명단에는 '고병림'이가 있었다. 경찰은 성을 부르지 않고 이름만 불렀다.

"병림이 나와!" 같은 마을에는 성이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김병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앞으로 나섰다. 김병림은 영문도 모르는 채 토벌대에게 끌려갔고, 인근 야산에서 처형당했다. 후일 고처옥의 처남이 되는 김병림이 그 사연의 주인공이다.

고처옥 집안도 4.3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아버지 고영홍은 한라산에서 붙잡혀 주정공장을 경유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아들 고처옥은 1949년 3월 귀순해 재건부락을 건설하는 데 강제동원되었다. 어머니 강윤평과 여동생은 토벌대에 의해 일찌감치 붙잡혀 서귀포에 있던 고구마창고에 구금되었다. 그들이 살던 보금자리는 일찍이 불타 버린 뒤였다.

고처옥과 어머니, 여동생이 다시 모여 살게 되었을 때는 기거할 집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남의 집 담 옆에서 이불만 덮었다. 1950년 봄이었다. 봄이라지만 야간에는 찬바람이 이불 속으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고처옥 모자는 그렇게 추운 봄을 보내고서야 보금자리를 장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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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화천에서 군 복무한 고처옥(앞줄 맨 왼쪽)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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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때 뭐했냐?" 고처옥은 23살에 군에 입대했는데, 하사관에 지원했다.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강원도 화천에 있을 때 보안대에서 호출이 왔다. "4.3때 뭐했냐?" "그때는 겨우 열여섯 살인데 뭘 했겠어요"라고 둘러댔다. 그렇게 신원조회는 간단히 끝났다. 제주도 출신에게는 무조건 신원조회를 했던 것이다.

그는 만기제대하지 않고, 1974년에 조기 제대했다. 그때부터 밀감농사를 지어 현재까지 하고 있는데, 젊을 때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현재까지 고생이다. 지금은 50미터 이상을 걷지 못하는데, 다행히 운전은 할 수 있어 그럭저럭 농사를 짓고 있다.

고처옥(87,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서귀리)은 71년 전 한라산에서 아버지와 헤어질 때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동쪽으로 뛰고, 자신은 서쪽으로 뛴 것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자신이 살아난 것이 천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박만순 기자(ndnda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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