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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크리틱] 닉 드레이크의 보상 없는 삶 /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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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영준 ㅣ 열린책들 편집이사

닉 드레이크는 언제부터 ‘성공’하기 시작했는가. 거의 주목받지 못한 앨범 세 장을 낸 스물네살의 무명 가수는 낙향을 결심한 1972년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해보려고 한 일은 다 실패했어요.” 2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1979년 음반사가 앨범 세 장을 묶어 세트 상품을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다. 1986년 웬 외국인이 찾아와 닉의 전기를 쓰고 있다면서 부모와 인터뷰를 했다. 덴마크에서 출판된 이 책은 영어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80년대 말, 매체에서 그의 이름이 가끔 언급되더니 90년대 중반이 되자 갑자기 모든 음악계 사람들이 너도나도 닉 드레이크에 대해 한마디씩 하게 된다. 소수의 지인들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1999년 닉의 <핑크 문>이 폴크스바겐 신차 광고에 쓰였다. 광고를 만든 미국인 넷은 닉의 노래에 각별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그해 닉의 음반 판매량은 열두배로 치솟았다. 2004년 <비비시>(BBC) 다큐멘터리 <닉 드레이크를 찾아서>에서는 브래드 핏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5년 전 그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열렬한 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닉 드레이크의 사후 성공담은 사람들이 매료될 만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보상받지 못하고 낭비된 인생, 수줍은 사람이 자초한 고독과 망각 등,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주제가 들어 있다. 음반, 영화, 책 등, 기록 매체 업계인들이 좋아할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록물이 영원한 이상 ‘정당한 평가’를 받을 날은 반드시 온다고 약속하는 것 같다. 닉 드레이크 식의 전설은 이런 기대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업계인들은 이게 환상만은 아니라고 느낀다. 당장은 팔리지 않아 창고에 쌓여 있는 것들이 나중에 어떤 계기로 팔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이런 업종은 존립 가능하지 않다. 닉의 이야기가 업계인에게 주는 것은 마치 이 사업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이다.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자. ‘1999년 음반 판매량이 열두배가 되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닉의 음반은 사실 조금씩이라도 계속 팔리고 있었다. 전해 판매량은 6천장. 많은지 적은지 판단이 어려운데, 아무튼 닉 드레이크는 절판된 적이 없다. 애초에 절판은 하지 않기로 계약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닉의 음반들은 아무리 안 팔려도 음반사 카탈로그에 계속 들어 있었다. 만일 사람들이 닉의 노래를 찾기 위해 중고 레코드점이나 도깨비시장을 뒤져야 했다면 총 30년이 걸린 닉의 부활은 그보다도 느리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죽기 얼마 전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답지 않게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당장 만나러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머리는 떡이 져 있고, 옷은 꼬질꼬질하고 손톱에는 까맣게 때가 낀 모습에 놀란 친구에게 그는 다그치듯 물었다. 내 음반에 대해 너희들은 좋다는 말을 했지만, 그럼 왜 안 팔리는가? 왜 세상 사람 아무도 나를 모르는가? 친구가 대답했다. 좋다고 팔리지는 않아. 그런 건 서로 관계가 없어. 이 주목할 만한 일화는 그의 조용한 인격이 결국 압력에 무너졌음을 보여주지만, 한편 수용자와 예술가가 서로 얼마나 동떨어진 입장인지 확인해 주기도 한다. 예술은 진정한 것이고 상업과는 무관하다는 말은 환멸에 빠진 예술가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품은 자기 길을 가겠지만, 예술가들은 보상을 원한다. 그 욕망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인들은 닉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첫 앨범 첫 곡을 녹음할 때를 지목한다. 닉은 삶에 많은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사후의 성공은 그가 바라던 방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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