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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시선]엘사의 용기가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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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4학년 즈음 찍은 내 사진을 보면 꽤 커다란 상처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광대 부근에 찰과상을 입었는데 나는 이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당시 우리집에서 큰길 쪽으로 나가려면 아파트 단지를 ㄷ자로 빙 돌아가야 했고 그게 귀찮은 아이들은 각자의 방법대로 지름길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난간 사이가 유난히 넓은 한 곳을 찾아내 그 사이로 몸을 빠져나오곤 했다. 보통은 나도 그곳을 이용했는데 웬일인지 그날은 큰 오빠들을 따라 멋지게 난간을 뛰어넘고 싶었다. 또래치고는 키가 컸던 터라 난간 위에 올라서는 일까지는 수월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풀쩍 뛰어내리면 될 줄 알았지만 나의 긴 치맛자락이 난간에 걸리면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갈아버렸다. 모험을 떠나는 여자에게 긴 치마는 결코 영리한 선택이 아님을 나는 몸으로 배웠다.

경향신문

디즈니도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나보다. <겨울왕국2>에선 모험을 앞둔 엘사가 머리를 질끈 묶고 치마를 벗어던지며 결의를 다지는 장면이 등장했다. 누군가는 그럴 거면 저 레이스도 뜯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이만큼의 변화에도 조금 감동했다. 솔직히 전편에서 온갖 고난과 맞서며 동생과 아렌델 왕국을 구하고자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온 엘사가 스텔레토 힐을 신고 싸울 때마다 고구마를 먹는 기분이었다. 저 신발만 벗어도 세 배는 빨리 달릴 수 있는데 목숨 걸고 싸우는 상황에서 왜 저런 신발을 고집하는지 답답했다. 그런 엘사가 달라졌다. 정확히는 제작자들이 달라진 것이겠지만. 옷을 간편히 입음으로써 진짜 도전이 시작되는 느낌이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 씩씩하게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두 자매의 모습이 멋졌고 극장을 가득 메운 아이들이 나와 같은 감정으로 몰입했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찡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감동은 딱 일주일 만에 깨졌다. 우연히 들른 쇼핑몰 사이트에서 <겨울왕국> 관련 상품 기획전을 봤다. 거기엔 ‘엘사처럼 예뻐질 수 있다’고 광고하는 어린이 화장품세트가 가득했다. 뷰티박스, 메이크업박스, 메이크업키트 등 고만고만한 이름을 달고 나온 상품들을 보고 있자니 감흥이 박살나는 기분이었다. 영화를 본 5~6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가 고작 엘사 언니처럼 예뻐지자뿐인 것일까. 과거와 어떻게 마주할 건지,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을 건지,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용기가 필요한지 할 말이 많아도 너무 많은 영화인데 왜 이런 작고 좁은 잘못된 결론으로 길을 내어주는 것일까. 인구 5000만의 나라에서 무려 1100만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엘사와 안나가 예뻐서 이 영화가 재밌었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왜 이 어른들은 영화를 보고 난 소녀들 손에 엘사와 안나가 그려진 화장품박스를 쥐여줄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냥 애들 장난감이니까 괜찮은 것일까. 놀이가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는 통로이자 사회적 기술을 익히게 해주는 도구라고 볼 때, 어떤 놀잇감을 제공할지는 중요한 문제다. 소품을 이용해 창의적으로 스토리를 짜고, 주변 인물과 관계를 맺으며 서사를 발전시키고 상상력을 동원해 결말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놀이를 통해 반복하며 아이들은 성장한다. 피아제는 ‘놀이는 아이의 작품’이라 했다. 아이가 만들어낼 작품이 고작 잘 칠해진 손톱이고 펄로 뒤덮인 눈두덩이라면 굽 있는 부츠를 벗어던진 엘사의 맨발 용기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제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다가오니 어린이에게 내밀 선물을 미리 준비하라고 사방에서 재촉한다. 무슨 선물이 좋을지 고민하는 모든 산타에게 조용히 부탁해본다. 부디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상상력을 높일 수 있는 장난감을 골라달라고, 다양한 곳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달라고,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한 가지 모습을 강요하지 말아달라고. 무엇이 좋을지 모르겠다면 산타에게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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